■ 이 책은 양유정(본명 양준석)의 첫 창작집 『마녀가 된 엘레나』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양유정은 1998년 현대문학에 「트랜지스터 공장 아가씨」와 「카프카의 밤」이 추천되어 등단한 이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주목을 끌어왔다. 창작집에는 그간 그가 발표했던 소설들 중 성격을 같이하는 8편의 작품을 자선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창작집 안에서 양유정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전체와 개인의 관계이고, 중심 소재를 가져오는 곳은 전쟁, 역사, 신화 속이다. 그 주제와 소재는 이미 여러 번 영사된 해묵은 필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신인이라면 당연히 비켜가야 할 테제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양유정은 이미 형성된 그 거대한 담론을 정면으로 가로지른다. 그는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디테일한 묘사보다는 남성적 힘이 담긴 직설적인 서사 전개를 취한다. 이 점이 양유정 소설을 다른 소설과 구별 짓게 하는 지점이다. 미시적인 묘사와 분석보다는, 지적이며 두터운 독서력을 바탕으로 역사 속으로 스러진 모델들을 소설 속에 살려내 현장감을 확보하고, 사건 중심의 예측하기 힘든 줄거리로 흥미진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최근 소설 경향과 거리를 유지하는 양유정 소설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지평리」는 한국전쟁 중 미군과 중공군의 격전지였던 ‘지평리'를 배경으로 한다. 중공군 낙오부대의 첸은 랴오를 비롯한 동료 셋과 지평리에 남아 부대의 후퇴 시간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는다. 말이 임무지 그들은 미 전차부대 진군 속도를 잠시 지체시키는 방패막이일 뿐. 첸은 아군 전체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물론, 남의 땅에서 낯선 이방인과 싸워야만 하는 전쟁에는 어떤 당위도 명목도 없다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결국 미군 전차가 닥치자 첸은 자신의 생명이 그 어떤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탈영을 한다. 「팔미도 등대」는 대를 이어 등대지기가 된 백도수 씨가 어느 날 미군 소속 정보장교의 요청에 의해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돕게 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이념적 갈등을 담은 이야기다. 백씨는 등대를 밝히는 날, 서울에서 흘러들어와 백씨의 조수가 되어 등대지기로 일하고 있는 젊은이 종민을 불러 등댓불을 밝혀야 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고 함께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종민은 일본 배도 미국 배도 비추고 싶지 않다며 뿌리치고, 대부도의 인민군 중대에 사실을 알리기 위해 팔미도를 떠난다. 「지평리 가는 길」은 「지평리」와 대구를 이루는 작품이다. 중공군이 가로막고 있는 지평리 일대를 미 전차부대가 신속히 뚫고나가기 위해 전차를 엄호할 중대로 베렛 대위의 L중대가 선발된다. 베렛은 연대장이나 대대장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지로 중대원들을 밀어넣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연대장의 야만적인 명령을 폭로하고 군법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결심만 곱씹을 뿐이었다. 드디어 중공군과 대치상황에 이르고, 전차 두 대가 파괴되고 여기저기 부하들이 쓰러지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결국 베렛도 총탄에 쓰러진다. ‘지평리'를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어떻게 강요되고 미화되는지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통해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희생양」은 표제로 삼은 <마녀가 된 엘레나>와 <라카엘라와 네그로스의 축제>, <존의 희망과 절망>의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 <라카엘라와 네그로스의 축제>는 스페인 탐험가 라카엘라가 핀리핀 네그로스 섬을 탐험하던 중 만나 원시부족의 야만적 제의―자신들이 사육한 인간을 토막내 살해해 제물로 바치는―에 관한 이야기. <존의 희망과 절망>은 위대한 작가를 꿈꾸던 존이 1차세계대전 중 징집돼 전방에 배치되었다가 독일군에게 패배 후 후퇴하던 중 아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한다. 연대장은 중대장들을 종신형에 처한 후 연대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섯 명의 희생양을 선발하는 데, 운 없게도 존이 거기 끼게 된다. <마녀가 된 엘레나>는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의 다른 이야기. 엘레나는 「칠레의 지진」 주인공의 모델이 되었던 여인, 여기서는 그 소설과 달리 지진이 일어난 후 마녀로 지목된 엘레나는 경찰에 의해 혀가 잘린 후 끌려가 공개 화형에 처해진다. 혀가 잘려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이밖에 「9월, 시에라리온」은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야만성을, 「Djibouti」와 「1월 1일」은 인간의 숨겨진 폭력성을, 「발굴」은 역사에 의해 잊혀진 어느 개인의 ‘역사'를 발굴해가는 문학의 역할, 문학이 있어야 할 위치를 소설로 담고 있다. ■ 본문 중에서 다른 이들은 첸의 마음과 다른 것인지 그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목표만은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사대라도 되는 것인지 랴오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니, 이는 대체 무슨 말인가.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우린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랴오의 말에서 우리라는 것은, 벌써 북쪽으로 후퇴한 아군 병력을 말하는 것이지 진실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아니라는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지평리」19~20p 그는 집에 들르지 않고 나룻배가 있는 곳으로 바로 갈 생각이었다. 그는 집에서 가져올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룻배를 타고 홀로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잠시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내내 대부도의 인민군 중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룻배를 보고, 바다를 보았을 때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용기가 솟아나길 종민은 바라고 있었다. ―「팔미도 등대」101~102p 진열대 밑에서 그는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연두색의 형광펜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것을 잠시 보다가 다시 수첩을 꺼내보았다. 죽은 병사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사진 오른쪽 하단에 연도와 장소가 표시되어 있을 것 같지만 지워져 보이지 않는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리곤 그 형광펜을 주워 그곳에 그어 보았다. 그러자 ‘上海'라는 글자와 그 바로 밑에 ‘魯迅公園'이라는 글자가 너무도 또렷이 드러났다. 하지만 찢겨진 부분이 있어 연도는 결국 드러나지 않았다. ―「발굴」172p 엘레나는 즉각 재판에 회부되어 블라스코 주교와 성직자들에 의해 마녀임이 증명되었고 화형이 결정되었다. 화형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이루어졌다.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 엘레나는 만틸랴(성당에서 기도할 때 머리에 얹는 천)를 쓴 산티아고 시민들이 던지는 숱한 돌멩이에 머리며 가슴, 다리를 다쳐야 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 산티아고에 없었기에 그녀를 동정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윽고 나무기둥에 묶인 엘레나의 몸에 닭기름이 뿌려졌고 주변엔 마른 장작더미들이 잔뜩 놓였다. ―「희생양」285p ■ 작품 해설 중에서 양유정은 역사나 기록과 같은 공식적인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식적인 기억이 억압하고 있는 것, 공식적 기억에 의해 망각된 것에 관심을 갖는다. 희생제의나 전쟁의 희생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도 배면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공식적 기억에 대한 불신이 탈역사, 탈정치의 행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회 역사적 현실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은폐된 기억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문학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문학 행위는 전체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작업이고, 탈각된 문자를 복원하는 수고이며, 망각의 늪에 빠진 기억을 건져 올리는 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 정재림(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