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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앤 포터 (세계문학 단편선 30) The Collected Stories of Katherine Anne Porter (1965)

  • 저자 캐서린 앤 포터 지음
  • 총서 세계문학 단편선
  • 부제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 역자 김지현
  • ISBN 978-89-7275-812-9
  • 출간일 2017년 12월 29일
  • 사양 864쪽 | 145*207
  • 정가 19,000원

아름답게 직조된 이야기 속에 시대의 어둠과 개인의 불행을 날카롭게 담아낸 미국 단편소설의 여왕 캐서린 앤 포터

양심이고 뭐고 간에, 매트리스 내놓는 건 내일 하면 뭐 어때? 아니, 대체, 이 집에서 살려는 거야, 아니면 이 집에 깔려 죽으려는 거야?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입가에 분노가 떠올랐다. 굉장히 위태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집안일은 내 일이기도 하지만 당신 일이기도 해. 나도 나만의 직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살면 내 직업에 들일 시간이 언제 나겠어?
또 그 얘기야? 내 일은 규칙적인 돈벌이가 되지만 당신 수입은 불안정하다는 거, 피차 잘 알잖아. 고작 당신이 버는 돈으로 우리가 먹고살려면…… 이 문제는 제발 이번에 완전히 결판을 내고 넘어가자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 말은, 우리가 각자의 직업에 자기 시간을 써야 하니까,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야? 순전히 알고 싶어서 묻는 거야. 그래야 나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지. 참 나, 그건 다 결론 난 거 아니었어? 내가 집안일을 돕기로 했었잖아. 그래서 늘 돕지 않았어? 여름마다?
맞잖아, 안 그래? 내가 도왔잖아? 아, 그렇잖아? 언제? 어디서? 대체 뭘 도왔는데? 와, 진짜 웃겨서 환장하겠네!
정말로 환장할 만큼 웃겼던 모양인지, 그녀는 얼굴이 살짝 자줏빛을 띠더니 자지러지는 웃음을 토해 냈다. 너무 격하게 웃다 못해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급기야 눈물을 왈칵 터뜨렸고, 당겨 올라간 입꼬리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_ 86쪽, 「밧줄」


휘플 부인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눈꼬리에서 흘러내리는 커다란 눈물방울을 닦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훌쩍거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휘플 부인은 “오, 얘야, 많이 속상한 건 아니지? 그치? 그렇게 많이 속상하진 않지?” 하고 자꾸만 물었다. 그 애가 그녀를 책망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따귀를 맞았던 때를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황소를 끌고 왔던 날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서 밤잠을 설쳤는데도 말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돌볼 수 없기에 영영 떠나보내려 한다는 걸 그 애도 아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건, 휘플 부인은 그 생각을 차마 견뎌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리며 둘째 아들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그 애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굴렀다. 그녀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애를 사랑했지만, 애드나와 엠리 생각도 해야만 했고, 그 애의 삶을 보상해 주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 아예 처음부터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는데.
_ 105~106쪽, 「그 애」


네가 조지를 좀 찾아 주렴. 조지를 찾아서 내가 그를 잊었다고 전해 다오. 그 일을 겪고도 나는 남편을 얻었고, 여느 여자들처럼 아이들도 집도 가졌다는 걸 그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어. 게다가 좋은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좋은 남편하고 살면서, 훌륭한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다고 말이야. 내가 원한 것보다도 더 많은 걸 누렸다고, 그가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돌려받고도 더욱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이야기해 다오. 오, 아니, 오, 하느님, 아니야, 그 집과 그 남자와 그 아이들 외에도 뭔가 또 있었는데. 오,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뭐였지? 돌려받지 못한 게 있는데…… 숨이 갈비뼈 안에서 꽉 차올랐다. 숨은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고 형태가 되어 가면서 날을 바짝 세웠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어마어마한 고통이 치밀었다. 그래, 존, 이제 의사를 불러 줘.
_ 153쪽,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


후스티노를 데려가려면 2,000페소를 내놓으라는 판사의 요구는 그대로였다. 빈센테도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리라. 빈센테는 그날 오후 내내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턱 아래 당겨 모으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너덜너덜한 샌들을 신은 양쪽 발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시간을 보냈다. 돈 헤나로가 가져온 나쁜 소식은 불과 반 시간 만에 용설란밭 전체에 퍼졌다. 식탁에서 돈 헤나로는 자기 생사가 걸린 문제로 마지막 기차를 잡아타야 하는 사람처럼 급하게 허겁지겁 말없이 먹고 마셨다. “도저히 못 해 먹겠습니다.” 그가 접시 옆을 탕 내리치면서 내뱉었다. “그 얼간이 판사가 나한테 뭐랬는지 아십니까? 고작 농노 한 명 가지고 왜 그리 걱정하느냐더군요. 그래서 내가 뭘 걱정하고 말고는 댁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대꾸했더니 그자가 하는 말이, 우리 아시엔다에서 총 쏘는 영화를 찍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총살 예정인 죄수들이야 감옥에 한 무더기 있으니 필요하다면 기꺼이 보내 주겠다지 뭡니까. 진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상황에서 왜 굳이 죽이는 척만 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요. 그는 후스티노도 총살감이라고 생각해요. 어디 한번 해 보라지요! 아무리 그래도 2,000페소는 절대로 못 주니까!”
_ 293쪽, 「아시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녀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을 잡은 채 잠 아닌 잠 속으로, 선명한 저녁 햇살이 비치는 작은 숲으로 떨어졌다. 그 숲은 분노에 휩싸인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음성 같지 않은 노랫소리들이 숲속 가득히 울려 퍼졌다. 쌩 날아가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음색이었다. 그런데 그 노래의 화살촉들 중 하나가 애덤에게 날아와 맞았다. 화살은 그의 심장을 관통한 뒤 그 뒤편의 나뭇잎들을 베어 내며 맹렬히 날아갔고, 애덤은 그녀의 눈앞에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멀쩡해진 몸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쏜 화살이 또다시 그에게 명중했고, 그는 쓰러졌다가 또다시 살아났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는 그렇게 온전히 남아 있었다. 미란다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기심을 주체 못 하고 그의 앞에 불쑥 뛰어들어 화살을 막아섰다. “안 돼, 이런 게 어딨어?” 놀이터에서 반칙을 당한 아이처럼 그녀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엔 내 차례란 말이야. 왜 항상 너만 죽는 쪽이야?” 그때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직격으로 꿰뚫고, 그의 몸까지 날아가 명중했다. 그러자 그는 죽었고,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숲이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쳐 댔다.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풀잎 하나가 모조리 각자의 목소리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달음질을 쳤다. 그러자 뒤따라 뛰어온 애덤이 방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따라잡고 말했다. “미란다, 나도 깜빡 잠들었나 봐. 왜 그래? 왜 그렇게 비명을 질러?”
_ 522~523쪽,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여기 오는 길에 배에서 만난 독일인들도 내내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하지만 사실, 저는 평생 동안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만약 생각을 했더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겠지요. 우리는 전쟁 말고는 생각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로자가 검은색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지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큰 은행에서 철창 너머 직원의 팔꿈치 사이로나 언뜻 볼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지폐가, 한 뭉치씩 고무줄로 묶인 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로자가 돈다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고작 10만 마르크짜리 지폐들일 뿐이죠…… 잠깐만요.” 그녀는 또 다른 돈다발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낱장을 훑었다. “이건 50만 마르크짜리예요. 또 이건……”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건 100만 마르크짜리 지폐 다발이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지폐 뭉치들을 하나씩 떨어트리면서, 내내 시선을 내려뜨린 채 그렇게 말했다. 잠깐이나마 그 돈의 가치가 예전처럼 느껴지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500만 마르크짜리 지폐, 본 적이나 있나요? 여기 그 지폐가 백 장이나 있어요. 이런 광경은 평생 다시는 못 볼 거예요. 그런데, 오!” 그녀는 일순 비탄에 북받친 듯 소리를 내지르며, 그 기만적인 종잇조각들을 두 손으로 움켰다. “이걸 다 가져가서 어디 빵 한 덩이라도 살 수 있나 해 보세요. 해 봐요, 해 보라고요!”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그녀가 두 팔을 맥없이 늘어뜨리자 쓸모없는 돈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_ 804~805쪽, 「기울어진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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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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