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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세계문학 단편선 40) Fantastyczny Lem. Antologia opowiadań według czytelników (2001)

  • 저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 총서 세계문학 단편선
  • 부제 미래학 학회 외 14편
  • 역자 이지원ㆍ정보라
  • ISBN 978-89-7275-853-2
  • 출간일 2021년 04월 30일
  • 사양 660쪽 | 145*207
  • 정가 17,000원

현존하는 거의 모든 SF 장르의 도서관
우주의 불가해 속 인간 존재를 탐험했던 미래의 철학자
스타니스와프 렘 최고의 단편소설 선집

■ 해외 서평

 
렘은 SF의 철학자다. 그의 상상력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계 설정에 심원한 우려와 통찰을 보임으로써 작품을 여타의 SF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렘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는 우리를 갈수록 깊어지고 아득한 곳으로 이끈다.
류츠신
 
내가 무인도에 책이 든 가방을 가져가야 한다면, 그 안에는 틀림없이 스타니스와프 렘이 있으리라.
올가 토카르추크
 
렘은 이미지를 놀랍도록 풍성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 창조에 있어 정말로 타고났다. 격하게 웃기고, 또 냉소적이고 황당하고 예리하다.
시어도어 스터전
 
이 시대 가장 지적이고 박학다식하며 익살맞은 작가.
앤서니 버지스
 
광기에 찬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앞으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일에 질겁한, 극단적인 비관주의의 대가大家. 너무도 힘들게 오랫동안 절망을 응시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자신을 찢어발기겠다고 위협하는 웃음의 경련에 붙들려 있을 때 렘은 가장 웃긴 것 같다. 「미래학 학회」를 쓴 것은 틀림없이 딱 그런 때였으리라. 그리고 렘을 시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좋아하게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작품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커트 보니것
 
렘은 과학 용어의 시인이다. 특히 매달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도착할 즈음이면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이들에게 렘의 책은 스릴 만점이다.
존 업다이크
 
나에게는 철학이고 종교고 그저 또 다른 장르에 불과하다. 결국에는 이야기만 오롯이 남는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렘은 결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을뿐더러 SF를 실망시킨 적도 없다. 따분한 렘 책은 이제까지 한 권도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최선을 다한 최고였다.
킴 스탠리 로빈슨
 
환상의 문학은 문학의 환상으로 변모했다.
스타니스와프 베레시(폴란드 시인)
 
비영어권 SF 작가 중 쥘 베른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스타니스와프 렘은 반세기 동안 창의력에 있어 폴란드 최고의 지성이었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언어로 글을 쓰고 성향과 정치적 장벽 때문에 운신에 제약을 받으면서, 1946년부터 1990년까지의 재앙의 시대에 철의 장막 뒤편에서 용케 활약했던―소련의 스트루가츠키 형제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세프 네스바드바처럼―누구보다 과감하게 위험을 무릅쓴 사변소설 작가로서―그들과 마찬가지로―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역시 글을 쓰기 전 의대에 다니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영국 작가 J. G. 밸러드와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냉정할 뿐만 아니라 일견 무감각할 정도로 인간 조건의 그로테스크함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
존 클루트, 《인디펜던트》(2009년 4월 1일 자)
 
렘은 박식가이자 이야기의 명장이자 문장가다. 이들을 합하면 결국 천재가 된다. 그는 자신의 학식의 반경과 깊이, 그리고 경향과 사고방식이라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미궁을 따라가는 소설을 꾸준히 창작해 왔다. 그의 주인공들―사실상 한 명도 빠짐없이 외톨이다―처럼, 그의 소설은 하루하루의 관심이나 열정과는 거리가 먼 듯하고 인간 조건―어떤 때는 신랄하고 어떤 때는 우스꽝스럽고 어떤 때는 불가사의하고 어떤 때는 소탈하고 어떤 때는 회의적이고 어떤 때는 사로잡힌 것 같고, 언제나 자기모순적이다―의 경계 위를 맴도는 마음의 감각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매우 강력하고 순수해서, 그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든 그 구체성과 풍성함,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친밀감과 영향력 때문에 즉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당신 자신을 위해 렘을 읽어라. 그는 중요한 작가, 우리 시대의 깊은 영혼이다.
《뉴욕 타임스》(1976년 8월 29일 자)
 
가히 노벨상을 받을 만한 SF 작가.
《뉴욕 타임스》(1980년 2월 17일 자)
 
신랄한 렘은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폴란드 작가로, 자유의지에서 확률론까지 철학과 물리학의 모든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우주 시대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다.
《뉴욕 타임스》(1982년 1월 22일 자)
 
이토록 지적인 물어뜯기, 이토록 엄격한 재치, 이토록 치명적인 장난스러운 줄타기…… 현대 유럽판 스위프트 혹은 볼테르.
피터 S. 비글, 《뉴욕 타임스》(1983년 3월 20일 자)
 
렘은 미래 기계의 희비극을 실감 나게 구현하는 데 있어 디킨스적인 천재성을 가졌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이기에, 위대한 폴란드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영어로 쓴)와 렘(폴란드어로 쓴)의 비교는 적절하다. 양자 공히 대단히 비관적이지만 렘은(마크 트웨인처럼) 비극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에 대처하는 도구로서 유머를 사용한다.
《뉴욕 타임스》(1984년 9월 2일 자)
 
과학, 철학, 문학에 대한 왕성한 식욕을 가진 번뜩이는 지성.
《뉴욕 타임스》(1985년 3월 24일 자)
 
인간관계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고 인류의 파우스트적인 지성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짐으로써, 렘은 스위프트나 볼테르 같은 작가와 동일시되었다.
《뉴욕 타임스》(1987년 6월 7일 자)
 
렘은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과 함께 언급되는 20세기 중반 SF의 거인이었다.
《뉴욕 타임스》(2006년 3월 28일 자, 부고)
 
스타니스와프 렘은, 의심의 여지 없이, 다른 은하계의 작가다.
《ABC》(스페인 일간지)
 
하포 막스, 프란츠 카프카, 아이작 아시모프가 흰토끼의 굴로 굴러떨어졌다.
《디트로이트 뉴스》
 
철학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 작가.
《더 타임스》(2006년 3월 28일 자, 부고)
 
렘의 유쾌한 유머 감각은 역설적으로 인류의 가능한 운명에 대한 그의 본질적인 진지함을 부각시킨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토록 광범위한 소재를 아우르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박식가적 호기심―명징함과 매력으로 탐구된 그 모든 것이 핍진함과 매혹을 상호 간에 배가시키면서 자연과학, 철학, 문학이 서로 융화되는 벤다이어그램 속에서 렘의 저작에 독특한 공간을 내준다.
《뉴요커》(2019년 1월 7일 호)
 
렘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탄복할 만한 이야기꾼일 뿐만 아니라, 기술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도전적인 철학자다.
《시카고 트리뷴》
 
그가 세상을 뜬 지 14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우주는 스타니스와프 렘이었던 거대한 창조의 힘을 따라잡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건대 그를 능가하려면 멀었다. 렘의 천재성을 즐기려면 독해의 수완과 작가가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향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경이로우며, 빠져들게 하고, 종종 배꼽 빼는 렘의 책들은 우리의 따분한 우주를 그에 비하면 밋밋하고 변변찮게 보이도록 한다.
《워싱턴 포스트》
 
진짜 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렘보다 더 잘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리 리뷰》
 
렘은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논평으로 강조된 유머를 가지고 글을 쓴다.
스티븐 에이치 실버(미국 SF 편집자)
 
렘에게 특정 유형의 신조어는 항상 텍스트 속에 묘사되어 있는 세계의 모형이 된다. 심지어 텍스트의 이데올로기까지도.
스타니스와프 바란차크(폴란드 시인)
 
렘이 SF에서 개척한 하위 장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도서관 서가의 A부터 Z처럼 읽힌다. 그는 가상의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에서부터, 엉뚱하지만 통렬하게 아이러니한 사이버네틱스 동화를 공들여 만들어 내고 지각 있는 바다와 소통하는 어려움을 예측하는 것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작가의 작가였다.
<제로 G>(오스트레일리아 라디오 프로그램)
 
상상력의 몹시도 유쾌한 도약으로, 렘은 가장 인기 있다는 거의 모든 우주 공상 과학극을 단숨에 앞질렀다.
《타임》(1979년 1월 29일 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 작가의 시대였다. 렘은 장르의 경계를 설정했다. 렘은 장르를 정의했다. 젊은 작가는 모두 렘을 반영했고 렘과 경쟁했다. 어떻게 한 명의 작가가 문학이란 분야 전체를 그토록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그는 그냥 천재였다.
《WWB(국경 없는 말들)
 
렘이 얼마나 옳았는지, 심지어 예견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 검색 엔진 이론(그는 ‘아리아드놀로지’라 명명했다), 생체공학, 가상현실(‘팬터매틱스’), 기술적 특이점, 나노 기술이 포함된다.
《뉴 사이언티스트》
 
렘은 장르의 천재가 아니라, 그냥 천재다.
《라 오피니온 데 말라가》(스페인 일간지)
 
문단의 아인슈타인, SF의 바흐.
피터 스워스키(캐나다 비평가)
 
 

 

■ 책 속으로

 

2041년도 미합중국 영토 전체에서 미리 예정된 전산적인 계획 없이는 아무도 닭고기를 먹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한숨을 쉬거나 위스키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지 않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깜빡이거나 침을 뱉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계획은 실행되기 몇 년이나 전부터 이미 현실과의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경쟁의 과정에서 세 개의 거대 기업들은 세 명의 인물로 이루어진 한 사람, 모든 힘을 가진 운명의 조종자를 만들어 낸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운명의 서다. 정당들이 미리 조정되고, 기상 상태가 조정되고, 심지어 에드 해머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도 규정된 주문의 결과였으며, 그 주문은 또한 연결되는 다른 주문들의 결과였다. 더 이상 아무도 자연적으로 태어나지도 사망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직접, 자기 혼자서, 끝까지 경험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생각 하나하나, 모든 두려움, 어려움, 고통 또한 컴퓨터의 대수학적 계산들을 연결하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죄와 벌과 도덕적 책임과 선과 악의 개념은 이미 공허해졌는데, 삶의 완전한 조정은 시장 바깥의 가치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특성을 100퍼센트 활용하고, 그것들을 결코 실망시키는 법 없는 시스템에 입력한 덕분에 컴퓨터가 조정한 천국에 모자란 것은 단 한 가지다―바로 그곳의 거주자들이 그곳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마찬가지로 세 개 기업 회장들의 회담 또한 주 컴퓨터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주 컴퓨터는 이들에게 그러한 지식을 제공해 주면서 전자화된 지식의 나무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완벽하게 미리 마련된 삶을 버리고 천국에서 새로운 또 한 번의 탈출을 시도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책임감이라는 짐을 영원히 벗어던지고 그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존재주식회사』」에서, 35~37쪽
 
그런데 교리에 따르면 신은 수정되는 순간에 영혼을 창조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만약에 수정란을 되돌릴 수 있고 같은 방식으로 수정란을 난자와 정자로 나누어 수정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면 이미 창조된 영혼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 기술의 부차적인 산물은 복제 기술, 즉 예를 들어 코, 발뒤꿈치, 구강 내벽 등등 살아 있는 신체에서 채취한 어떤 세포라도 정상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술이었다. 이것은 수태와 전혀 관계없이 진행되었으며 원죄 없는 잉태의 생물 기술도 한 치의 빈틈 없이 발전해서 마찬가지로 산업 분야의 규모로 커졌다. 배아 형성 또한 이미 되돌리거나 촉진하거나 방향을 바꾸어 인간 배아가 예를 들면 원숭이로 발전하도록 변형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코디언처럼 쭈그러들었다 늘어났다 하는 것인지 혹은 배아 발달의 도중에 인간에서 원숭이로 목적지가 바뀌면 그 과정 어딘가에서 사라지는 것인지?
그러나 교리에 따르면 영혼은 일단 생긴 후에는 사라질 수 없으며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므로 감소될 수도 없었다. 배아공학 분야의 공학자들에게 교회의 파문장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서 진작 숙고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으며, 체외수정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체외수정을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이미 아무도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자궁기(인공 자궁) 안에 보관된 세포에서 태어났으며, 처녀생식의 방법으로 생겨났다는 이유를 근거로 하여 인류 전체에 영성체를 거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욱 곤란하게도 다음 기술이 나타났다―인공 의식이었다. 전자지성과 그 지성을 갖춘 컴퓨터들로 인해 탄생한 기계 속의 영혼이라는 문제까지는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뒤따라 생겨난 것은 액체 속에 든 의식과 정신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똑똑한 용액이 합성되었고, 이 용액은 병에 넣거나 여러 곳에 나눠 담거나 한곳에 합칠 수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매번 개성이 생겨났고, 이 개체는 모든 디흐토니아인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몇 배나 더 숭고하고 현명했다.
「스물한 번째 여행」에서, 56~58쪽
 
[…] 후에 모두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그 몇 초 후 힐튼호텔은 실수로 인류애탄의 폭격을 받고야 말았다. 결과는 끔찍했다. 인류애탄은 사실상 호텔 낮은 층에서도 중앙부와는 거리가 있는 곳에 떨어졌는데, 해방출판협회에서 전시를 하기 위해 빌려 놓은 장소였다. 그래서 일단 호텔의 투숙객들 중 직접적으로 폭격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끔찍한 결과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경찰들에게서 나타났다. 노출된 지 단 몇 분 만에 부대는 집단적으로 그 효과를 보여 주었다. 내 눈앞에서 경찰들은 얼굴에서 방독면을 벗어 던지고 양심의 가책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시위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더니 그들에게 자신들의 단단한 진압봉을 억지로 안기고는 되도록이면 가장 세게 자기들을 때려 달라고 애원했다. 공기 중에 분사된 인류애탄의 농도가 더 진해지자 이번에는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엉겨 붙어 아무나 닥치는 대로 쓰다듬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생기기 시작한 비극들은 몇 주나 지난 후에야 겨우 부분적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정부는 아침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을 일찌감치 제압하기 위해서 도시의 상수원에 700킬로그램이나 되는 두 배 농도의 인류애약을 행복정과 평온정과 함께 살포하기로 결정했다. 경찰과 군부대 쪽으로 통하는 상수도를 차단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실험을 거치지 않은 것이 이런 사태를 부르고야 만 것이었다. 방독면을 통해 흡입될 수 있는 가스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으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실로 다양한 경로로 수돗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 또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미래학 학회」에서, 150쪽
 
“꿈은 허락만 한다면 언제나 현실을 이긴답니다. 제 아들들은 정신화학 문명의 희생자인 거죠. 누구나 이 유혹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혀 희망이 없는 사건을 변호하러 나설 때, 그게 환각의 법정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신선하면서도 쌉쌀한 키안티의 맛을 즐기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는 멈칫했다. 만약에 가상으로 시를 쓰고 가상의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면 가상을 먹고 마시는 일은? 이 생각에 크롤리 고문은 웃을 뿐이었다.
“그런 일은 없답니다, 티히 선생. 성공에 대한 환상이 우리 머리를 채울 순 있겠지만, 커틀릿의 환상이 배를 채우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게 살았다간 굶어 죽기 십상일걸요!”
아버지로서의 크롤리 고문의 처지에 적지 않은 동정심이 일면서도 나는 이 말에 안심했다. 가상의 음식이 실제 음식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 육체의 본성이 정신화학 문명의 무한한 상승을 견제한다는 것은 다행이다. […]
「미래학 학회」에서, 216쪽
 
“티히, 이건 내가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미래언어학 덕분에 우리가 우주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후세대를 위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걸 누가 심각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가설을 말할 수 있는 게 어딥니까! 20년만 전에 언어학이 좀 더 발전했더라면, 그때만 해도 그냥 보통의 폭탄과 구별되는 각종 화학탄을 예상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인류애탄을 기억하죠? 언어라는 것은 자기 안에 거대한, 하지만 끝이 없는 것은 아닌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사실은 아무 곳에도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 미래학자들은 알고 있지 않았잖습니까.”
「미래학 학회」에서, 238쪽
 
그런 뒤에 힌덴드루펠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소유한 식기세척기가 여러 번에 걸쳐 자기 주인의 양복으로 갈아입고 다양한 여성들에게 결혼을 약속하여 돈을 뜯어냈으며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검거될 당시 놀라서 굳어진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분해했다. 분해한 뒤에 세척기는 범행에 대한 기억을 잃었고 그러므로 처벌받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맥플래컨-글럼브킨-램포니-흐물링-피아프카 법안이 탄생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분해하는 전자두뇌는 폐기 처분되었다.
「세탁기의 비극」에서, 281쪽
 
정부 당국에서는 마트라스를 사칭하는 존재의 행각을 즉각 중단시키려 하였는데, 뭔가 작전을 개시하려면(그것은 ‘작전’이어야만 했다) 뭐라도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맥플래컨 법안에는 부동산을 다루는 민사소송법에 관련된 부칙이 붙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전자두뇌는 다리가 달려 있지 않은 경우에도 동산으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성운 속에 있는 개인의 신체는 그 규모가 소행성급에 달했는데, 천체는 설령 스스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부동산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행성을 체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대두되었으며, 또한 로봇들의 합체가 행성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과연 분해 가능한 하나의 로봇인지 아니면 여러 개의 로봇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겨났다.
「세탁기의 비극」에서, 290쪽
 
“누가 올린 게 아니고 뭐가 올린 거죠. 컴퓨터예요. 기억장치요. 물질과 에너지에는 질량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나 정보는 물질도 에너지도 아니지만 어쨌든 존재해요. 그러니까 질량도 있어야 한다고요. 돈다의 법칙을 구상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무한히 많은 정보가 직접적으로, 어떤 기기의 도움도 없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겠어요? 그것은 즉 거대한 양의 정보가 곧장 나타난다는 뜻이죠. 거기까지는 생각했지만 균형의 공식을 몰랐던 거예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단순히 말해서 정보의 무게는 얼마냐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기획 전체를 생각해 내야만 했어요.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요. 이제는 알아요. 기계가 100분의 1그램 더 무거워졌으니 그게 정보가 더해 준 무게인 거죠. 이해돼요?”
“교수님.” 내가 신음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모든 주술과 마법과 기도와 주문과 1초당 주술그램, 그러니까 CGS 단위는……”
교수가 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몸을 흔들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교수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돼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 둬요, 정보는 질량을 가진다고요. 모든 정보가. 어떤 정보든지.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원자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돌을 구성하든 내 머리를 구성하든. 정보에도 질량이 있지만 그 질량은 전례 없을 정도로 작아요. 백과사전 전체 정보의 무게는 1밀리그램 정도예요. 그래서 나는 저런 컴퓨터가 필요했던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 봐요, 누가 나한테 그런 걸 주겠어요? 반년 동안 허튼소리, 사기, 말도 안 되는 아무 정보나 저장할 1100만 달러짜리 컴퓨터를? 아무거나 저장한다고요!”
「A. 돈다 교수」에서, 332~333쪽
 
무르다스왕은 다시 생각했다. 물론, 그 앗아 가는 것 역시 단지 꿈속에서의 일이지만 만약 음모가 나의 전체 몸을 장악한다면, 산에서부터 바다까지 모두를, 아, 그랬다간 좋지 않은데! 그럼 더 이상 깨어나고 싶지 않아질 거야, 그럼 어떻게 되지? 그럼 나는 영원히 현실로부터 분리되고, 삼촌은 나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고문을 하고, 모욕할 거야, 고모들은 말할 것도 없어. 똑똑히 기억하지만,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원래 그랬으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그 끔찍한 꿈에서 말이지! 하지만 꿈 얘기를 해서 뭐 하나? 꿈은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있는 것인데, 돌아갈 현실, 하지만 그 현실이 없다면(그리고 그들이 만약 나를 꿈에 붙잡아 놓는다면, 나는 어떻게 돌아가지?), 꿈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의 유일한 현실은 이미 꿈이 아닐까! 그것이 현실이라고! 끔찍하다! 그러니까 나의 확장 때문에, 이 영혼의 확장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맙소사!
「무르다스왕 이야기」에서, 359~360쪽
 
[…] 상상해 보라. 내가 나의 BIX 310092 컴퓨터에 거대한 주변기기를 장착하고 이 기기를 ‘초세속적 세계’로 설정한다. 그런 뒤에 연결 케이블을 통해 나의 페르소노이드들의 ‘영혼’을 주변기기 안으로 전달하여 그곳에서 나를 믿고 나에게 공물을 바치고 나에게 고마움과 신뢰를 표한 자들에게 상을 주고 반면에 다른 모든 자들은―페르소노이드적 어휘를 사용하자면 ‘비신적자’들은―벌을 주어, 예를 들어 없애 버리거나 고통을 준다고 하자(영원한 처벌에 대해서 나는 감히 생각도 못 하겠다―나는 그런 괴물이 아니란 말이다!). 나의 이런 행동은 반드시 놀랍고도 믿을 수 없이 후안무치한 이기주의이며 사악하고 비논리적인 보복 행위, 한마디로 나에게 맞설 방법이라고는 반박 불가능한 논리만을 가지고, 그 논리를 준거로 삼아 행동한 죄 없는 자들에 대한 완전한 지배 상황에서 궁극적인 악행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페르소네티카 실험에 대해 자신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여기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언 콤베이 박사는 개인적인 대화 중에 나에게, 어쨌든 페르소노이드들의 사회에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는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로서는 어떤 이후의 단계를 요청하는 것―즉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불운한 창조주로서, 깊은 부끄러움과 약점을 찔린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그들이 나에게 대체 무엇을 유발하거나 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소모된 전기에너지의 요금은 분기별로 납부하게 되어 있고 나의 대학 상부에서 실험 종료를 요구하여 그러므로 기계를 끄는 순간, 즉 세상의 끝이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다. 그 순간을 나는 할 수 있는 한 오래 연기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찬양받을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체로 속된 말로 ‘개 같은 의무’라고 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나는 이 표현에 대해서 아무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생각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아서 도브의 『논 세르위암』」에서, 420~421쪽
 
[…] “[…] 나는 혼자이므로 이미 아무에게도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혼자라는 인식이 나에게는 독이기 때문에 혼자 지내지 않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나는 하느님에게 의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어서 우리의 논리적인 로빈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타인이 없다는 것은 물이 없는 물고기와 같지만, 대부분의 물이 더럽고 탁한 것과 같이, 내 주변 환경도 쓰레기장과 같았다. 친척, 부모, 상사, 선생들을 내가 직접 선택하지 못했고 그것은 심지어 애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그냥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은 불운이 나에게 내려 준 대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만약에 선택이 가능했다면). 설령 쓰레기장이었다고 해도 일단 내가 태생부터―가족과―동료까지 우연한 상황 속에 살도록 운명 지워졌다면 불평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창세기의 첫 문장이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쓰레기는 치워 버려라!’”
「마르셀 코스카의 『로빈슨 연대기』」에서, 445~446쪽
 
반면에 아나톨 포슈는 《르 누벨 크리티크》에서 《피가로 리테레르》에 실린 동료의 판정에 의문을 표하며 우리가 생각건대 매우 정곡을 찌르는 의견을 냈는데, 즉 네파스트는 『로빈슨 연대기』의 장단점과는 관계없이 정신과 관련한 자격은 없다는 것이다(이 뒤로 유아론과 정신분열 사이에 전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긴 논증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이 문제가 이 책에 있어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그 관점에서 독자를 ‘새로운 비평’으로 이끌어 가도록 한다). 그리고 포슈는 소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작품은 창조의 행위가 비대칭적임을 보여 주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모든 것을 생각으로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후에 모든 것을 똑같이 무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거의 불가능하다). 창조하는 사람의 기억 자체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포슈에 따르면 소설은 실제로 정신병적인 이야기(무인도에서의 어떤 광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보다는 창조 과정에서 제정신을 잃은 상태를 보여 준다. (2권에서) 로빈슨의 활동은 그 자신이 그 결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만 무의미한데, 반면에 심리학적으로는 완전히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상황을 그저 조각조각 예측했을 뿐인 사람이 그 상황들 속을 헤쳐 나갈 때에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소동이며, 상황들은 그 나름의 내적인 규칙에 따라 강화되면서 그를 가두어 버린다. 현실의 상황들에서는―포슈는 이 점을 강조한다―현실적으로 도망칠 수 있다. 반면에 상상해 낸 상황들에서는 물러설 수 없다. 그래서 『로빈슨 연대기』에서 상상의 상황들은 인간에게 진짜 세상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만을 보여 준다(‘외부의 진짜 세상이 내면의 진짜 세상이다’). 코스카 씨의 로빈슨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그저 무인도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인공 세계를 관리하려던 계획은 걸음마 단계부터 이미 실패할 운명이었을 뿐이다.
「마르셀 코스카의 『로빈슨 연대기』」에서, 460~461쪽
 
“알아 둬라, 낯선 여행자여.” 그가 말했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집단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을 억누르는 모든 근심과 고통과 불운의 원천에 대하여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그 원천은 개인과 개인 안의 사적인 개성에 있다. 사회와 집단은 강력한 태양과 별들에 의지하듯이 영원하며 지속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법규에 의지한다. 개인의 특성이란 불안정성, 결정의 불확실성, 행동의 우연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상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를 위하여 개인성을 완전히 근절시켰다. 우리 행성에는 오로지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그 안에 개인은 없다.”
“아니 어떻게.” 내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건 그저 비유적 표현임이 틀림없다, 당신도 어쨌든 개인인데……”
“최소 단위로서는 그렇다.” 그는 변함없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우리가 얼굴을 서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아마 알아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적인 최대의 대체 가능성’에도 도달했다.”
“이해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뜻인가?”
“지금 설명하겠다. 매 순간 사회에는 일정한 수의 업무들, 혹은,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위상이 존재한다. 이것은 직업적인 위상이므로 정치가들, 정원사들, 기술자들, 의사들 같은 것이다. 또한 가정적인 위상도 존재한다, 아버지, 형제, 자매 등등이다. 이 모든 위상에 대하여 판타인은 단 하루만 주어진 위상을 맡는다. 자정이 되면 우리 국가 전체에서 하나의 움직임이, 마치, 시각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한 걸음을 걷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어제는 정원사였던 개인이 오늘은 엔지니어가 되고, 어제의 건설 노동자는 재판관이 되고, 정치가는 선생님이, 기타 등등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가족도 비슷하게 기능한다. 모든 가족은 혈연으로 구성되고, 그러므로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이 있지만, 이 위상들만 변함없이 남아 있고 그 자리를 채우는 존재들은 24시간에 한 번씩 바뀐다. 이렇게 해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공동체뿐인 것이다, 알겠나? 언제나 부모와 자녀의 수, 의사와 간호사의 수 등등은 동일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국가라는 강력한 조직은 대대손손 흔들림 없고 변함없이 바위보다도 굳건하게 지속되며 그 지속성은 우리가 개인적 존재의 짧고 덧없는 속성과 영원히 작별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완벽한 방식으로 서로 대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다, 자정이 지나서 만약에 나를 호출한다면 나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 당신에게 올 테니……”
「열세 번째 여행」에서, 488~490쪽
 
“당신 행성에서 죽음에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내가 물었다.
이마에 주름을 짓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은 채 변호사는 마치 그 단어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나를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죽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이다. 개인이 없는 곳에 죽음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당신 자신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외쳤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게 돼 있어, 당신마저도!”
“나라니, 그건 대체 누구지?” 그가 미소를 띤 채 내 말을 막았다.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당신, 당신 자신이지!”
“오늘의 위상을 넘어서면 나 자신이라는 게 대체 누구지? 성, 이름? 난 그런 게 없다. 얼굴? 우리 사회에서 몇 세기나 전에 도입된 생물학적 치료 덕분에 내 얼굴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과 똑같다. 위상? 그건 자정이 되면 변한다. 남은 게 뭐가 있지? 없다. 죽음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그 불가역성 때문에 비극적인 상실이다. 죽는 사람 자신은 누구를 잃지? 자기 자신? 아니, 죽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을 수 없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이다. 누군가 가까운 사람을 상실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절대로 잃지 않는다.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의 모든 가족은 영원하다.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위상의 응축일 것이다. 법률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가야 한다. 낯선 여행자여 안녕.”
「열세 번째 여행」에서, 492~493쪽
 
[…] 내가 동시에 여러 명일 수 있는가? 여러 개의 주어진 과거에서 탄생할 수 있는가? 독초처럼 솟아난 기억들 속에서 뽑아낸 나의 논리력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뭔가 하나의 과거를 가져야만 한다고 말했으며, 일단 내가 틀레닉스 여백작이고 가정교사이자 보호자인 조로엔나이 부인이며 발란드 민족에 의해 바다 건너 랑고도토국國에서 고아가 된 어린 비르기니아인 이상, 내가 거짓으로 상상한 이야기와 현실을 구별하고 자신의 진짜 기억 속에서 스스로가 누구인지 찾아낼 능력이 없는 이상, 어쩌면 나는 어쨌든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어디선가 교향악이 울려 퍼졌고 무도회는 산사태처럼 강력하게 진행되었다―이보다 더 현실적인, 나를 깨울 수 있는 현실에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했다.
「가면」에서, 504~505쪽
 
[…] 내가 수도사들에게 접근한 이유는, 또한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은 이유는 진정으로 자유를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보다는 자유를 찾고 싶었다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인데, 어쨌든 나는 한 번도 자유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자유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할 생각인지 묻는다면 나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 모른다는 사실은 전혀 새롭지 않은데, 나체에 칼을 찔러 넣을 때도 나는 자살하고 싶은 것인지 그저 알아내고 싶은 것인지 몰랐고, 심지어 전자와 후자가 같은 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그러한 결정도 이후에 일어난 다른 모든 사건들이 증명해 주듯 이미 예견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희망조차 그저 환상일 수 있었으며 심지어 나의 고유한 환상조차 아니고 바로 이렇게 적용된 기만적인 충동에 의해 내가 더욱 활달하게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내 안에 장착된 것일 수도 있었다. […]
「가면」에서, 560~5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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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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