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또 다른 이름, 나나의 은밀한 유혹! 인간의 욕망과 내면 탐구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 작가 서하진의 장편소설! 2010년 2월호부터 2011년 5월호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절찬리 연재되었던 소설 『나나』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세련되고 탁월한 문체로 인간 내면의 욕망을 섬세하게 그려온 소설가 서하진은 그동안 평범하고 서정적인 일상 속에서 숨겨진 비범함을 통해 우리의 삶과 비정한 현실을 보여주던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파괴력을 가진 매력의 팜므파탈 나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가족관계까지 파탄에 이르게 하는 사랑에 대한 탐욕, 그 목적을 위해 타인들의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하지 않는 여자 나나, 그녀로 인해 부유하는 삶을 사는 오빠 인영, 운명처럼 찾아온 새로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버리고 아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애란, 오랫동안 꿈꿔온 소설가의 길을 포기하고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정섭, 이들이 엮어가는 네 가지 형태의 삶은 윤리적으로, 도적적으로 지켜온 삶이,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준다. 작가는 그런 삶을 견뎌내는 이들의 외로운 삶의 이면을 통해 결국 자신의 자리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그것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모순된 삶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 줄거리는
열세 살 인영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른, 완전한 남남인 여동생 나나를 얻게 된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나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인영은 나나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힘들어지자 미국으로 홀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생활 중 인영이 동네 어린 갱에게 옆구리에 칼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고, 병원에 입원 중이던 인영을 만나기 위해 나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나나로부터 자신을 최대한 방어했던 인영의 의지와 육체는 갑작스레 나타난 나나의 따뜻하고 막을 수 없는 손길 아래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그 밤 이후 나나는 홀연히 한국으로 돌아가버린다. 하지만 몇 년 후 한국으로 돌아온 인영은 여전히 나나로 인해 방황하고, 그사이 인영의 친아버지는 등산 중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나나의 결혼 이후에도 나나에게 속하지도, 놓여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인영은 한밤중 우연한 사고로 애란을 만나고, 병이라 할 정도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자폐를 앓고 있는 아들로 인해 지쳐가던 애란은 인영을 만난 후 새로운 인생을 직면하게 되고 그에게 점차 의지한다. 인영의 친구 정섭에 의해 애란과 자주 조우하게 된 인영 역시 애란을 통해 나나로부터 놓여나는 자유로움을 누리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함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 미래에 대한 야망을 위해 더 큰 권력과 부를 손에 넣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나는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선임 받고자 졸업장을 위조하고 선임 과정에 절대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그녀만의 방법으로 회유하고, 이혼으로 연락이 끊겼던, 비루하지만 여전히 허영덩어리인 친부와 조우한다. 딸, 나나와 만나기 전 몰래 인영의 본가에 찾아든 나나 친부의 뒷모습을 우연히 본 나나의 친모 희주는 그를 실종된 인영의 아버지로 오해하면서, 섬망이라는 병이 유명 화가인 희주에게 실체를 드러낸다. 서재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숨겨져 있던 비망록을 통해 아버지의 실종에 나나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안 인영은 혼란에 빠지고, 이를 추궁하는 인영에게 나나는 예상치 못한 그날의 일을 고백한다. 참다운 사랑과 자유를 얻고자 애란을 붙잡고 싶은 인영과, 인영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위해 아이의 치료를 위해 휴지기 같은 시간을 마음속에 담아놓은 채 인영과 헤어짐을 선택한 애란, 그들의 마지막 날 둘은 정섭의 아지트로 향하고 그곳에서 인영과 애란, 그들을 찾아온 나나에게 예기치 않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되는데……
▲ 작품해설 중에서
서하진의 『나나』는 그 제목에서부터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를 떠올리게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소설은 사회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에밀 졸라가 기획했던 계보학적인 총서인 ‘루공 마카르 총서’ 중의 한 권이다. 발자크의 총서 『인간 희극』을 계승하고 있는 이 총서의 뿌리에는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여인이 있고, 그녀의 신경증적인 기질은 그녀가 결혼하고 관계를 맺는 두 남성인 루공Rougon과 마카르Macquart의 기질, 습성과 결합하여 수많은 자손들을 통해 발현된다. 『나나』의 중심인물인 파리의 여배우 나나는 광기와 나태와 도취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고, 졸라의 관점을 따르면 그녀의 파멸은 예정된 수순일 뿐이었다. 서하진의 나나 역시 자신이 처해 있는 계보학적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업을 호기롭게 꾸려갔지만 말에 진실성이 없고 거짓말을 자주 하곤 했던 친아버지와 고상한 화가이자 교수로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우아하게 살았던 친어머니 사이에서 현재 나나가 가진 기질과 습벽은 어떤 면으로 ‘결정’되었다.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며 거짓의 수렁으로 이끌고 가면서도 육체적으로 산뜻하고 우아한 활기를 잃지 않는 양가적인 모습은 나나가 처해 있던 환경의 맥락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341p-342p
작가의 성性이나 기질적인 차이도 작용한 까닭이겠지만, 서하진은 자신의 나나를 완전히 발가벗기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에 소설의 언어-카메라가 초점을 맞출 때에도, 예컨대 그녀의 나신은 “하얀 네글리제”(149쪽)로 감싸여 있다. 맨몸의 구석구석이 온전히 드러날 법한 목욕 장면에서도 작가는 나나의 “부드러운 피부”(41쪽)에 주로 초점을 맞추며 그녀를 마치 바다의 희고 고운 포말 속에서 막 태어난 보티첼리의 비너스처럼 표현하지, 건조하고 적나라한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박학다식함과 예술적 재능을 무기로 사내들을 사로잡는 나나는 어떤 면에서 도도한 뮤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나의 육체가 예술적인 대상으로 추종될 무대인 욕실은 파리의 극장을 대체하는 현대적이며 장식적인 공간이다. -342p-343p
『나나』에서 서하진은 우리가 삶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크나큰 진실을 펼쳐놓고 있다. 삶에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위한 예방 접종은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능동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내가 수동태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나의’ 운명이 ‘나의’ 의지를 벗어나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파탄의 과정은 이미 그리스 비극 이후로 지난하게 반복되지 않았는가. 운명의 대양大洋 앞에 선 인간의 손아귀 사이로 시간이, 삶이, 죽음이, 사랑이 흘러내린다. 우리가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은 결국 모두 예상을 깨는 ‘사건’들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연속적인 사건들의 성좌星座이리라. -346p-347p
나나는 근대의 프랑스에서든 현대의 한국에서든 문자 그대로 파산한 존재였다. 주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욕망과 자본주의 사회의 집단적인 욕망이 서로를 불려가는 과정에서 재정의 파탄과 신용의 파탄을 봉합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요했고, 타인들이 이 치명적인 여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욕망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 천연두에 걸려 흉측하게 일그러진 나나Nana의 시신에는 화농化膿이 흐르고 세균이 들끓는다. 출구는 유럽적인 혁명의 물결뿐이다. 군중들은 베를린을 연호한다. 서하진의 나나는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져 있다. 육체에 대해서든 윤리에 대해서든 위생학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부패하기 쉬운 몸은 병원에서 보호된다. 우리의 출구는 어디인가. 혁명 없는 시대, 혹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사랑의 출구가 아닌가. 연인을 위해 자신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것인 육체를 희생한 여자를 ‘순결한 천사’로 쉽게 환원해 버리는 것은 작가도, 나나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리라. 정직과 기만 사이의 어딘가에서 동요하는 것이 결국 세속 도시 안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윤리 감각이듯, 삶과 죽음의 문턱 위에 멈춰 머무르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시간의 좌표일 것이다. 외로워서 거짓의 옷을 입었다가 자신의 몸으로 연인에게 옷을 입힌 여인의 머리맡에, 우리는 이 몇 개의 문장을 꽃 대신 남겨둔다. 상하지 않은 연인이 지키고 있는 그녀의 머리맡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354p
▲ 본문 중에서
나나는 종이인형처럼 얄팍한 몸피를 가진 아이였다. 저토록 흰 얼굴이 있다니 싶을 만큼 맑은 피부. 아이답지 않은 검고 숱 많은 머리채. 그 눈동자에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듯 몽롱함이 담겨 있었다. 오빠야, 인사해야지. 그 어머니의 말에도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볼 뿐 입을 열지 않던 나나는 사흘 만에야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아이가 그를 부르는 순간, 처음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듯 조심스레 오빠, 하고 부르는 순간 인영은 그 아이의 오빠가 되었다. 인영의 나이 열세 살, 나나는 그보다 세 살이 어렸다.-32-33p
어릴 적부터 딸은 그러했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그저 자신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선하며 그 반대의 것은 나쁘다고 믿었다.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 이야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를 즐겼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탓이었을지도 몰랐다.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시작된 엄마와 아빠의 끝없는 언쟁 때문일 수도 있었다. 허영심이 많았던 전남편, 입만 열면 수십억대의 사업이 펼쳐지고 세상 누구라도 제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노라 큰소리치던 사람. 나나의 거짓말이 그의 유산이라고는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예쁜 아이였으므로, 그 눈빛이 그지없이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은 조잘조잘 얘기하는 나나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희주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거짓말이 나나를 더욱 아름다워 보이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무언가를 꾸며내는 나나의 눈은 끊임없이 반짝이고 그 안색은 홍조로 빛이 났으며 거의 사로잡힌 듯 보였다. 그런 나나에게 대부분의 사람들, 그녀, 희주조차도 사로잡혀 있었다. -36p
옷걸이의 코트를 벗겨내 건네는 이 팀장 쪽으로 나나가 등을 돌리며 섰다. 그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나나에게 코트를 입혀주었다. 부드러운 모피의 소매를 빠져나온 부드러운 손으로 나나는 이 팀장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이 팀장은 바로, 나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공들여 선택한 사향의 향기가 전해지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엉거주춤, 손을 잡힌 채 서 있는 그를 나나가 살짝 잡아 당겼다. 이 팀장의 숨결이 조금 가빠졌다. 보지 않아도 나나는 그의 복잡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점장으로 있었던 어느 해 자금유출사건에 연루되었던 경력이 있는 사내. 그 불리함을 딛고 강남의 PB센터 팀장이 되었으니 그는 이면의 계약, 이면의 거래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나가 그를 선택한 이유였다. 나나는 잡힌 이 팀장의 손, 그 손바닥 한가운데를 살짝, 부드럽게 간질였다. 이 팀장의 몸이 움찔했다. “도와주시면……” 나나는 잠깐 말을 끊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52p
결국 이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인하더라도, 피해 가려 발버둥 치더라도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거죽과 뼈와 텅 빈 가슴뿐이었던 그의 육체가 비로소 숨쉬기를 시작한 것 같은 밤이었다. 날이 밝으면 나나가 어떤 얼굴을 할까. 이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을까. 나나의 감은 눈을 연습하듯 마주 보던 인영이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집은 거짓말처럼 비어 있었다. 올 때 그러하였듯 나나는 아무런 것도, 어떤 인사도 남기지 않았다. 지극히 나나다운 이별이었다. - 116p
핏발이 선 인영의 두 눈이 나나를 노려보았다. 나나 역시 인영을 마주 노려보았다. 나나의 숨결이 폭발할 듯 거칠어졌다. 나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날 아침, 등산복을 입은 그를 나는 따라갔어.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그냥 그러고 싶었어. 친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오빠의 아버지는 내내 나를 먼 친척 보듯 했으니까. 아니, 그건 맞지 않아. 더러운 것을 보듯, 벌레 보듯 나를 피했어. 나는 그걸 참아낼 수가 없었어. 끝까지 따라간 건 아니야. 바위산이 시작될 즈음에는 내 운동화로는 따라가는 게 불가능했어. 내가 그를 불렀어. 아빠, 하고 부르자 그는 뒤돌아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섰어.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 그랬어. 그는 귀신을 보기라도 한 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웬일이냐, 어디서 나타났느냐, 왜 내 뒤를 밟았느냐, 묻지도 않았어. 내가 다가갔어. 다가가서 그의 팔짱을 꼈어.” 인영은 숨을 멈추고 나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팔짱을 꼈던 나나가 어디까지 함께 갔던 것인지, 어째서 홀로 돌아왔는지 그 아침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연유는 무엇인지, 이제부터 나나가할 말이 그는 두려웠다. 그만, 거기서 그만 이야기를 멈추라고 하고 싶었다. 나나에게 팔을 잡힌 채 서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나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 328p
▲ 작품해설 중에서
서하진의 『나나』는 그 제목에서부터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를 떠올리게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소설은 사회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에밀 졸라가 기획했던 계보학적인 총서인 ‘루공 마카르 총서’ 중의 한 권이다. 발자크의 총서 『인간 희극』을 계승하고 있는 이 총서의 뿌리에는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여인이 있고, 그녀의 신경증적인 기질은 그녀가 결혼하고 관계를 맺는 두 남성인 루공Rougon과 마카르Macquart의 기질, 습성과 결합하여 수많은 자손들을 통해 발현된다. 『나나』의 중심인물인 파리의 여배우 나나는 광기와 나태와 도취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고, 졸라의 관점을 따르면 그녀의 파멸은 예정된 수순일 뿐이었다. 서하진의 나나 역시 자신이 처해 있는 계보학적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업을 호기롭게 꾸려갔지만 말에 진실성이 없고 거짓말을 자주 하곤 했던 친아버지와 고상한 화가이자 교수로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우아하게 살았던 친어머니 사이에서 현재 나나가 가진 기질과 습벽은 어떤 면으로 ‘결정’되었다.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며 거짓의 수렁으로 이끌고 가면서도 육체적으로 산뜻하고 우아한 활기를 잃지 않는 양가적인 모습은 나나가 처해 있던 환경의 맥락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341p-342p
작가의 성性이나 기질적인 차이도 작용한 까닭이겠지만, 서하진은 자신의 나나를 완전히 발가벗기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에 소설의 언어-카메라가 초점을 맞출 때에도, 예컨대 그녀의 나신은 “하얀 네글리제”(149쪽)로 감싸여 있다. 맨몸의 구석구석이 온전히 드러날 법한 목욕 장면에서도 작가는 나나의 “부드러운 피부”(41쪽)에 주로 초점을 맞추며 그녀를 마치 바다의 희고 고운 포말 속에서 막 태어난 보티첼리의 비너스처럼 표현하지, 건조하고 적나라한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박학다식함과 예술적 재능을 무기로 사내들을 사로잡는 나나는 어떤 면에서 도도한 뮤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나의 육체가 예술적인 대상으로 추종될 무대인 욕실은 파리의 극장을 대체하는 현대적이며 장식적인 공간이다. -342p-343p
『나나』에서 서하진은 우리가 삶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크나큰 진실을 펼쳐놓고 있다. 삶에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위한 예방 접종은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능동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내가 수동태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나의’ 운명이 ‘나의’ 의지를 벗어나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파탄의 과정은 이미 그리스 비극 이후로 지난하게 반복되지 않았는가. 운명의 대양大洋 앞에 선 인간의 손아귀 사이로 시간이, 삶이, 죽음이, 사랑이 흘러내린다. 우리가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은 결국 모두 예상을 깨는 ‘사건’들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연속적인 사건들의 성좌星座이리라. -346p-347p
나나는 근대의 프랑스에서든 현대의 한국에서든 문자 그대로 파산한 존재였다. 주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욕망과 자본주의 사회의 집단적인 욕망이 서로를 불려가는 과정에서 재정의 파탄과 신용의 파탄을 봉합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요했고, 타인들이 이 치명적인 여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욕망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 천연두에 걸려 흉측하게 일그러진 나나Nana의 시신에는 화농化膿이 흐르고 세균이 들끓는다. 출구는 유럽적인 혁명의 물결뿐이다. 군중들은 베를린을 연호한다. 서하진의 나나는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져 있다. 육체에 대해서든 윤리에 대해서든 위생학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부패하기 쉬운 몸은 병원에서 보호된다. 우리의 출구는 어디인가. 혁명 없는 시대, 혹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사랑의 출구가 아닌가. 연인을 위해 자신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것인 육체를 희생한 여자를 ‘순결한 천사’로 쉽게 환원해 버리는 것은 작가도, 나나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리라. 정직과 기만 사이의 어딘가에서 동요하는 것이 결국 세속 도시 안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윤리 감각이듯, 삶과 죽음의 문턱 위에 멈춰 머무르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시간의 좌표일 것이다. 외로워서 거짓의 옷을 입었다가 자신의 몸으로 연인에게 옷을 입힌 여인의 머리맡에, 우리는 이 몇 개의 문장을 꽃 대신 남겨둔다. 상하지 않은 연인이 지키고 있는 그녀의 머리맡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35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