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잇고 문학을 조명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쉰여덟 번째 시집 조성래의 『햇빛 반사 유희』를 출간한다. 202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첫 시집 『천국어 사전』을 통해 고단한 청춘의 현실과 슬픔을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그려내며 주목받은 조성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상실과 상처의 슬픔에도 지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
시집 『햇빛 반사 유희』
첫 시집 『천국어 사전』에서 도처의 죽음과 그에서 비롯된 내밀한 슬픔을 묵직하고 과장 없는 어조로 풀어냈던 조성래 시인이 신작 『햇빛 반사 유희』를 선보인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은 인간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나’와 ‘나’가 놓인 상황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이어가며 마음의 파동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한편, 무심히 스쳐 지나던 공간과 시간 속의 ‘정서적 유대’와 일상의 풍경을 탐색한다. 결핍과 상실로 인한 힘겨운 현실을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생을 지속하게 하는 감각과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신작 시 43편과 에세이를 함께 실었다.
“살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하여
끝끝내 나는 살아내고 싶다”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배고프고 추운 꿈”(「불면」)을 꾸게 하는 장소로, “공짜 같은/세상을 끝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무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하지만 어느 날 옥상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천국이 30년쯤 살다 간 흔적 같”고, 그 변함없는 곳에서 인류에게 “변질될 수 없는 착함”(「이 벤치에 흰색 곰인형 버리고 온 적도 있다」)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조성래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주변의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고, 그 속에 어린 빛의 굴절과 산란, 반사를 통해 내면의 감각을 깨우는 과정에 가깝다. 힘겨운 생활을 맨몸으로 부딪히면서도, 삶에 정주하고자 애쓰는 시인의 태도는, 반지하의 어둠 속에 하나의 창을 내는 일과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을 단번에 지우는 강력한 구원이기보다, 삶을 다시 모색하게 하는 작고 지속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햇빛의 시간은 결국 저물고, 때가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아늑한 어둠으로 돌아간다. 손끝에 머물다 사라진 빛이 비록 유한한 것이라 해도, 흩어져 멀리 날아가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파편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어느 날의 기억들은 단정한 시가 되어 곁에 남는다. 『햇빛 반사 유희』는 그 기억을 통해 서로에게 곧 “우리가/빛”(「밤가시마을」)이고 위로였음을 조용히 환기시키고 있다.
삶을 시로 번역해내려는 뜨거운 진심
에세이 「어느 경리의 어떤 경지에 대한 단상」
에세이 「어느 경리의 어떤 경지에 대한 단상」은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시인은 어느 작은 컨테이너 공장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사장의 업무 지시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수술로 인해 목소리를 잃고 바람 소리뿐인 사장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경리 직원은 사장의 입 모양을 보기도 전에 말의 의미는 물론 의중과 뉘앙스까지 척척 옮겨준다. 시인은 생각한다. 그저 바람 소리만 흘러나오는 자신의 삶, 자신의 쓺에 대하여. 결국 시 쓰기란 뻐끔거리는 입의 대리자가 되는, 경리의 일임을.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과 고집, 부끄러움이 정직하게 드러난 이 글은 창작자로서의 고통과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진솔한 고백이다.
■ 추천사
조성래 시인은 실제 삶의 궤적을 그대로 작품에 투사한다. 그는 시적 화자라는 가면을 쓰기보다 평범하고 부끄러운 인간 조성래의 상황과 기억, 육체를 언어로 배치한다. 그의 가난과 노동, 그리고 일산에서의 평온함과 불안은 모두 시인 조성래가 통과 중인 실제 시간의 기록일 것이다. 나는 그의 시라는 창으로 현재를 사는 한국 사회 청년과 아프게 직면한다. 그가 담담하게 뱉는 이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래를 나는 오래오래 보고 싶다.
—시인 김이듬, 「발문」 중에서
■ 본문 중에서
내가 인因이며
과果
그 간격엔 온통 아름다운 세상뿐,
―「보건소 가는 길」 부분
오늘 내 삶에 괴로움이 없다
그것은 모든 심정의 매진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다
―「액자」 부분
빛나는 것들이
빛 속에서
빛 속에 있음을 모르고
그 모름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평범함을 누리고 있다
―「밤가시마을」 부분
모든 외로운 사물은
사건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그 자리에서 사물로 끝나는 것들을
마음이라고들 그랬습니다
―「없어야 하는 일」 부분
가혹한 모든 세계에서 나는 죽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내게 다정한 세계
살아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의 증거
―「규칙 4」 부분
나는 추운 연애 속에서
나라는 담뱃불을 문질러 끄고
순한 양을 길러 너에게 보낸다
―「벨 에포크」 부분
내 마음이 드넓은 바람에 차례로 흔들릴 때도
난 꼼짝없이 서 있었다 부드러운 물결인 것은
마음, 황금으로 물드는 것도 마음, 그게 다
불에 타버려도 안 죽고 서 있는 것도
마음,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나의 어떤 마음들은 무적이었다
―「들판의 허수아비」 부분
나보다 한 꺼풀 아래에 잠들어 있는, 그 입의 바람 소리를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간지러움. 폐병 걸린 자의 그 속 간지러움이 결국 내게 시를 쓰게 한 것 같다. 시는 그때 뱉은 가래인데, 결국 아름다운 모양의 가래여야 한다는 것. 사람들이 보고 박수 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는 것. (……) 이 빌어먹을 인간의 통역을 성공한 것 같을 때의 속 시원함, 일순간의 해방감이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 「어느 경리의 어떤 경지에 대한 단상」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