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거울

페이스북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블로그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링크 복사하기

57 회

정부(왕정)의 가장 큰 사무는 백성들에게

시기를 놓치지 게 하는 일이니.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중에서

 

논물에 비친 산 그림자는 내가 살며 만난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다. 산 그림자가 모내려고 물 잡아놓은 논에 들어앉은 그림은 평화롭다. 어쩌면 산 그림자란 말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모든 그림자의 배후에는 빛이 있다. 그림자는 빛이 직진하려는 힘의 미래다. 그림자는 빛보다 앞선 공간에 존재한다.

그런데 논물에 든 푸른 산 그림자는 태양을 등지고 있지 않다. 태양을 등진 산 그림자도 있기는 하나, 그 그림자는 일반적인 그림자와 같이 흑백이다.

푸른 산 그림자 비친 논물은 거대한 거울이다. 논물 거울에는, 수동적인 흑백의 산 그림자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가와 자신을 비춰보고 있는 푸른 산도 있다. 논물 거울이 없다면, 큰 물가가 없는 이곳에서 산은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산은 제 높이의 여 배나 되는 거리를 와 논물에 잠길 수 있는 것일까?”

도랑물 타고 내려온 것 아닐까요?”

내려오고 싶어 산이 도랑에 물을 흘렸다는 말인가.”

후배의 대답에 머금었던 미소가 다시 살아난다.

 

논으로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 소리가 요란하다. 마력 낮은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자신을 한 번 봐달라는 것처럼 애절하다. 다가가 보니 온몸을 떨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다. 마중물 한 모금 마시고 이리 넓은 논에 자기 혼자 물 다 대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기특하구나!’

몸에 연결된 전선줄에 비해 몇 배 굵은 호스로 물 토해내는 양수기를 칭찬해준다. 끄르륵 끄르륵, 알아줘서 고맙다고 양수기가 소리 내더니 다시 콸콸 물을 뿜는다.

농지정리 된 들판에는 전봇대가 흔하다. 옛날 논들은 높낮이가 있어, 위 논에 물이 차면 아래 논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 양수기 돌릴 전력이 요하기 때문이다.

모를 이미 낸 논에서 물장화 신은 촌부 서 명이 뜬모를 하고 있다. 그들은 모춤 들고 천천히 걸어 나아가다가 모가 꽂히지 은 곳에서 허리를 굽힌다. 그 모습이 그들보다 앞서 걷다가 먹이 발견하고 자세를 낮추는 백로와 흡사하다. 트럭 한 대가 다가와 경적을 울린다.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며 빨리 끝내고 다음 논으로 가자고 소리친다. 촌부들이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선다. 허리에서 우드드득 소리가 났는지 백로가 날아오른다.

수평水平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부자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논까지 내리뻗은 작은 산모롱이를 돈다. 아카시, 찔레, 나무 흰 꽃들과 엉겅퀴 짙은 보라색 꽃을 만나고 아직 하체만 푸른 갈대숲에서 들려오는 개개비 떼 소리를 듣는다.

 

다시 논다랑이들이 펼쳐진다. 외진 논 가에 써레질하며 진흙을 뒤집어쓴 트랙터 한 대가 커다란 게처럼 멈춰 서 있다. 수로 안 논에서는 이앙기가 지나가며 모로 점을 찍어 푸른 줄을 그린다. 논에 비친 산을 자세히 보려고 논길로 접어든다. 금방 써레질을 마쳤는지 흙탕물이 난 논에는 산 그림이 없다. 산 그림이 인화되고 있는 시간인가보다. 모가 꽂힌 논으로 다가간다. 한 걸음 다가가면 모 꽂힌 산이 한 걸음 물러선다. 모 꽂힌 논에 이는 물결은 모 내지 은 논에 비해 자잘하다. 물결이 모에 부딪히며 상쇄되어서인지, 아니면 어린 모를 생각하는 바람 때문인지 하여간 그렇다. 물속에 든 산의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경계선에는 물결이 유난히 많다. 산 전체에도 물살이 일기는 이는데, 푸른빛 때문에 물살이 잘 보이지 아 대조를 이뤄 더 그렇게 보이는 듯싶다. 또 산의 경계에 서 있는 나무 형체는 비교적 잘 드러나는데 산 전체에 있는 나무들은 그냥 푸른빛으로만 어룽어룽 보인다. 액체 거울 속에서도 경계는 치열하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한계와 대립을 극복하고자 제3의 방향으로 제시된 공동체 운동은 인간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유기농법(생명의 농법)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하며,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죽이고 빼앗는 농법인 화학농법(현재 관행되는 농법)으로써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유기농법과 한살림운동을 통해 죽임의 질서를 거부하며 살고 있는 경북 의성 땅의 농부 김영원의 글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 같으면 지금쯤, 산에서 떡갈잎을 뜯어 논에 밑거름으로 넣고 흙을 갈아엎을 때가 아닌가. 모를 내기는 아직 이르고. 그때 산 떠난 떡갈잎들 만나러 논물 속으로 내려오던 기억이 유전되어, 산이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상념에 젖어 있는 내게 낭만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자각이 한 농부의 글을 떠올려주었을지도 모른다.

 

논물 거울. 이 거울은 한 가계家系를 비춰온 거울이 아닌가. 한 가족이 행복한 삶을 기원하던 신앙으로서의 거울이 아닌가. 이 거울은 먹을 것을 생산해내는 농경의 거울이지 않는가. 이 거울은 가구당 평균 농가 부채가 2,600만 원인 이 땅의 농부들이 관절 삐걱이며 걸어 들어가 땀을 흘려야 하는 터전이다.

농사를 여름질’, 농부를 여름아비 또는 여름지기라고 열매(여름)란 말의 의미를 살려 우리말을 만들어 썼던 다석 류영모 선생은 주고, 주고 다 주어버리고 목숨까지 주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다. 다석 선생의 말뜻으로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 산성화되어 죽어가면서도 쌀을 생산해내고 있는 논만큼 처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논들은 물 거울로 평화로운 풍경을 담아 보여주고, 농부들을 맞아주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찌하란 말인가?

농부가 걸어 들어가면 부드러운 물소리를 내며 깨졌다가 곧 다시 아물어 붙는 논물 거울.

논물 거울눈물 거울이라 부르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논물 거울과 눈물 거울, 논물과 눈물을 반복하여 읊조려보는데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내 탁한 눈동자 거울에 모습을 비춰준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나를 지나가준 풍경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

우리 현대문학 회원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내지는 타사의 메일을 차단하기 위해,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2월 19일]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