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씨익 웃더니 인파 쪽을 가리켰다.
“봐, 저쪽에 바이에른하고 리옹 오케스트라 예술 감독이 와 있어. 뮌헨에서 콘서트가 있어서 우연히 들렀대. 밑져야 본전이니 정기 연주회 솔리스트로 써주지 않겠냐고 타진하러 가볼래? 뮌헨 최고 순위 두 명을 세트로, 하루에 한 사람씩 어떠냐고.”
“뭐? 너하고 세트로?”
너새니얼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승자가 없다’는데, 세트 판매라도 해야지.”
너새니얼은 작게 웃었다. 그녀가 ‘우승자가 없다’고 프리드리히 하우저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좋아, 가볼까?”
소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_56쪽, 「사자와 작약」
당연하지만 이 시기에 홉이 열려 있을 리 없었다.
열매는커녕 눈에 닿는 것은 전부 이랑, 이랑, 이랑.
황량한 토지가 펼쳐져 있다.
다만 이랑에는 가느다란 막대기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런가. 이게 녀석이 보던 풍경인가.”
저편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이랑에 꽂힌 막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딘가 아련하게 봄 내음이 났다.
히시누마는 그 냄새를 가슴 한가득 들이마셨다.
불현듯, 또다시 「봄과 수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진실한 언어는 여기에 없고 수라의 눈물은 땅을 적시네)
그렇구나, 너는 여기에 있구나. 이 어딘가에서, 너의 소리를 듣고 있구나.
_83~84쪽, 「가사와 그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너새니얼 곁을 떠날 때 마사루를 쳐다보고 싱긋 웃었다.
“어이, 설마 숨겨둔 아들은 아니겠지?”
장난스레 속닥거린다.
그러자 너새니얼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얘는 스타야.”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잠시 어리둥절하게 너새니얼과 마사루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지만 이윽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어리둥절한 것은 마사루도 마찬가지였다.
“?” 마사루가 너새니얼을 쳐다보자 너새니얼은 다시 한번 말했다.
“너는 스타야.”
마사루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껌뻑거렸다.
스타? 내가?
너새니얼은 문득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음악은 커. 내포하는 것도 굉장히 크고, 예상 밖으로 복잡하고 다면적이야.
_104쪽, 「하프와 팬플루트」
빛이 쏟아지고 있다.
그 빛 속에 자그마한 소년이 있었다.
열심히, 앳된 움직임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다.
문득 그의 안에서 오늘 새벽녘에 꾸었던 꿈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꿈속에서 나는 이 광경을 보았던 게 아닐까?
한참 피아노를 치던 아이는 피아노에 드리운 사람 그림자를 보았는지 연주를 뚝 멈추고 돌아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 작은 얼굴.
활짝 벌어진 커다란 눈.
무척이나, 아름다운, 빛에 감싸인…….
그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감동과도 같은 신비한 고양감이 치밀어 오른다.
“안녕?”
그는 그렇게 말을 걸며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의자에서 사뿐히 내려와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_147~148쪽, 「전설과 예감」
■ 지은이_ 온다 리쿠恩田陸
1964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집필, 1992년 일본판타지노벨대상 최종 후보에 오른 『여섯 번째 사요코』로 문단에 데뷔했다. 2005년 『밤의 피크닉』으로 제26회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과 제2회 서점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2006년 『유지니아』로 제59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2007년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로 제20회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일본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에는 12년에 걸친 구상과 11년의 취재, 7년의 집필 끝에 완성한 대작 『꿀벌과 천둥』을 출간, 일본 출판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무대로 인간의 재능과 운명, 음악의 세계를 가장 아름답게 그렸다고 평가받은 이 작품은 2017년 제156회 나오키상과 제14회 서점대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역사적인 첫 동시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19년에는 『꿀벌과 천둥』이 영화화된 데 이어 주요 인물들의 비화를 담은 소설집 『축제와 예감』이 출간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데뷔 30년을 앞둔 온다 리쿠는 지금껏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SF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70여 편에 가까운 작품들을 발표했고,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한국과 일본 독자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 옮긴이_ 김선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일본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을 비롯하여, 이사카 고타로의 「명랑한 갱 시리즈」 『러시 라이프』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종말의 바보』,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 「소시민 시리즈」 『왕과 서커스』, 그 밖에 『문신 살인사건』 『손가락 없는 환상곡』 『고백』 『열쇠 없는 꿈을 꾸다』 『완전연애』 『경관의 피』 『흑사관 살인사건』 『꽃 사슬』 등이 있다.
2017년 일본 문학사상 최초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 수상하며 한일 양국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순수한 열정과 냉정한 비즈니스가 공존하는 콩쿠르를 무대로 세상에 음악을 전하고자 분투하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 “온다 리쿠 문학의 정점”으로 불린 이 작품의 스핀오프 소설집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꿀벌과 천둥』 이후 4년 반 만에 찾아온 신작 『축제와 예감』은 전작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주요 인물과 그 주변인들의 내밀한 이야기 여섯 편을 담고 있다. 무대 위에서의 치열했던 경쟁을 뒤로하고 사이좋게 입상자 투어에 나선 세 명의 참가자들(「축제와 성묘」), 압도적 실력과 스타성으로 콩쿠르를 달구었던 마사루와 그의 스승 너새니얼의 인연(「하프와 팬플루트」), 전작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콩쿠르 과제곡 <봄과 수라>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탄생 비화(「가사와 그네」),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과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의 강렬한 첫 만남의 순간(「전설과 예감」)까지. 요시가에에서 각자의 음악을 인정받기 위해 격돌하고 때로는 영감을 주고받으며 ‘프로 음악가’로 성큼 발돋움한 청년들과 그들을 둘러싼 음악인들의 과거와 현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꿀벌과 천둥』은 그 자체로도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세계이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는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소설집은 전작에 열렬한 애정을 보내준 수십만 독자를 위해 온다 리쿠가 준비한 특별한 ‘앙코르 무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단편과 마지막 단편의 제목을 조합한 ‘축제와 예감’은 『꿀벌과 천둥』 이후 펼쳐지는 음악인들의 ‘축제’에서 출발해, 전설을 ‘예감’케 했던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운을 증폭시키는 이 소설집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축제와 예감』을 읽다 보면 잊고 있던 『꿀벌과 천둥』이 가슴속에서 서서히 되살아나고,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다시금 전작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반가운 연말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