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한 작가 장 필립 뚜생 장편소설. 일상의 작은 소재들이 상징하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압축시켜, 인간의 본질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도쿄를 배경으로, 욕망의 행위로서의 사랑의 진부함과 허무함을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그려낸다.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모든 걸 끝장내기 위해' 염산병을 챙긴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어나고,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자신들의 관계를 어긋낼 것이란 예감을 하는데….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Faire l'amour)을 가진 이 책은 '육체적 충동과 욕망의 변주곡으로 산화되는 사랑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두 주인공의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 이 균열이 서로 공명하며 증폭되어, 결국 사랑의 허무, 소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내면의 파장을 보여준다.
지은이 장 필립 뚜생 Jean Philippe Toussaint 195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알제리에서 2년 간 교사 생활을 했다. 한때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종이와 펜만으로도 가능한 문학 세계에 뛰어들었다. 처녀작 『욕조』는 발간 직후 이십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명성을 떨칠 만큼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로브 그리예 이후의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지목받았다.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권에서 충실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작은 소재를 상징적, 감각적으로 다룸으로써, 인간의 본질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에 몰두하고 있다. 2005년 『도망치기』로 프랑스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에게 수여되는 메디치상을 수상하였으며 곧 출간할 예정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욕조』 『무슈』 『사진기』 『망설임』 이 있다. 옮긴이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일 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거대한 고독』 등이 있으며, 현재 숭실대 불문과 교수.
2005년 메디치상 수상작가이자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층에서 충실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장 필립 뚜생 10년 만의 신작 『사랑하기』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문학과 영화,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전방위적 활동을 보이는 그는 일상의 작은 소재들이 상징하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압축시킴으로써, 인간의 실존과 그 본질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에 몰두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이라는 일본 문단의 찬사를 아울러 받고 있는 뚜생은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일본 체류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그리고 중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자 2005년 메디치상을 받은 『도망치기』로 뚜생은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사랑하기』는 ‘지움’―‘흐리기함’으로써 더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서 뚜생은 육체적 충동과 욕망의 변주곡으로 산화되는 사랑의 심리를 미시적으로 포착해냈다. 이 작품으로써 그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으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 작품은 도쿄를 배경으로 “그녀가 내게 원한 것은 육체적 온기” “육체와 육체가 맞닿는 데에서 비롯되는 충동”이라는 주인공의 고백처럼, 그 자체뿐인 욕망의 행위로써의 사랑의 진부함과 허무함을 차갑고 건조하며 간결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 이 균열이 서로 공명하며 증폭되어 결국 사랑의 허무, 소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내면의 파장을 보여준 『사랑하기』는 뚜생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란 찬사를 받았고 이는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줄거리 패션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모든 걸 끝장내기’ 위해 염산병을 챙긴다. 마리는 내게 묻는다. “왜 내게 키스하지 않는 거죠?”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마리에게 키스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키스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사랑을 어긋내버릴 거란 걸 예감한다. 한밤중 팩스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데스크로 내려간다. 데스크에 안내자가 없어 나는 호텔용 슬러퍼를 신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도쿄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꼭 원시 자연 같다고 생각한다. 팩스를 가지러 다시 데스크로 내려간 나는 팩스를 읽고 있는 마리와 마주친다. 마리 역시 슬리퍼 차림이다. 그리고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우리의 사랑에 불길한 징후가 느껴진다. 우리 둘은 호텔에서 나와 도쿄 거리를 활보한다. 편의점에 들러 우동도 먹고 양말도 사 신는다. 밤새 내린 눈이 녹아버려 땅은 질척거리고 마리와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며 택시를 기다린다. 우리의 예감을 증명하듯 택시기사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한 나는 마리와 다툰다. 그리고 곧 지진이 일어난다. 출근하던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거나 쪼그려 앉아 공포에 떨고 마리와 나 역시 지진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호텔로 돌아온 마리와 나는 패션쇼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고 나는 교토에 있는 베르나르의 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이틀을 보냈을까. 마리가 보고 싶다. 마리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진 나는 한밤중 마리의 전시회장을 찾아간다. 여전히 한 손엔 염산병을 든 채. 전시회장에서 마리의 영상을 본 나는 밖으로 나와 어느 누구도 아닌 꽃에 염산을 뿌리고 서사는 막을 내린다. *본문 중에서 나는 예전에 과산화수소수를 담았던 채색 유리병에 염산을 가득 채운 뒤 여차하면 어떤 놈의 면상에다 뿌릴 생각으로 염산병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 내 생각의 칼날을 벼려주는 호박색깔의 부식성 액체를 담은 이 유리병을 수중에 품은 뒤부터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마리는 그 산성 액체가 결국에는 내 눈, 내 시선에 뿌려지지 않을지 아니면, 바로 자기 얼굴, 몇 주 전부터 줄곧 눈물에 젖어 있는 자기 얼굴에 뿌려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의 불안감도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니라는 시늉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야, 마리, 그렇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있는 배불뚝이 유리병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9p 나는 이따금씩 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았고, 필경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더 이상 서로를 참아내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서로에게 나쁜 짓보다는 좋은 짓을 더 많이 했지만 서로에게 가하는 그 작은 나쁜 짓을 이제는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76p 그녀의 울음은 나를 원망하는 울음이었고 눈물과 눈으로 젖고 흐느낌으로 팔다리를 떨고 있던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내 품에 꼭 안겼다. 극도의 공포, 피곤, 탈진, 그리고 지난밤에 가혹하게 자극되었던 감각은 억누를 수 없는, 위로받고 싶은 욕구, 육체의 합일을 향한 뜨거운 욕망으로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왜 내게 키스하지 않는 거냐고요? 그녀가 내게 원했던 것은 나의 유연한 대화술이 아니라 육체의 온기였으며 그녀는 나의 말과 생각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마음의 충동, 내 손과 내 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내 팔, 육체와 육체가 맞닿은 데에서 비롯되는 충동이었다. ―81p 밀물이 몰려오거나 가는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처럼 마리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마리는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으면서 눈물을 뺨 위로 보란 듯 드러내며 흘러내리게 했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마리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바로 지진에 관해 이야기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지진은 이제 우리 사랑의 종말과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06p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이라며 그녀는 내 팔을 꽉 쥐었다가 팔을 쓰다듬더니 모직 외툿자락을 다시 잡아당기며 나를 설득하겠다는 듯 내 팔을 힘껏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심지어 가혹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요즘, 요즘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108p 텅 빈 시간은 느리고 육중하고 정지한 것 같아서 내 인생에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마리 곁에 있지 않은 것, 그것은 마치 구일 간의 폭풍 뒤에 바람이 잦아진 것과 같았다. 그녀와 함께한 매 순간은 자극적이고 경악스럽고 긴장되고 극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자력, 그녀의 후광, 대기 중에 떠도는 존재의 전기, 그녀가 들어간 방 안의 포화 상태를 끊임없이 느꼈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조용한 오후, 피곤과 권태, 시간의 연속뿐. ―142p 야생화, 펜지, 바이올렛,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고 한 발자국도 더 가지 않았고 지겹고 지치고 절망한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끝장내기 위해 염산을 꽃 위로 부었고 꽃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끔찍한 악취와 함께 단숨에 오그라들고 움츠러들면서 위축되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연기를 뿜는 화산구와 이 무한히 작은 재앙의 근원이 나였다는 느낌을 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169p 그의 소설을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이라고 환대했던 것인데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볍게 툭툭 건드리다가 돌연 차갑게 토라지는 것이 선승보다는 털실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뚜생은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머물기도 했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당시 체류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 『사랑하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것도 역시 균열이다. …… 지진이 사랑했던 여인과 갈라지는 사건과 병행하면서 두 균열은 서로 공명하며 증폭된다. 은근하게 지축을 뒤흔들었던 파괴적 에너지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미세한 균열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이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