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 SF의 고전이자 SF계의 혁명선언문
데이비드 R. 번치의 『모데란』 한국어판 정식 출간!
현대문학-폴라북스의 과학소설 총서 ‘미래의 문학’은 문학사적인 의의뿐만 아니라 작품 본연의 재미에도 충실한 해외 걸작을 소개하고 있다. 미래의 문학 열한 번째 도서는 뉴웨이브 SF의 고전이자 SF계의 혁명선언문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R. 번치의 『모데란』이다. 이 책은 ‘모데란Moderan’이란 하나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쓰인 쉰일곱 편의 단편을 엮은 연작소설로 유토피아가 파멸, 곧 디스토피아라는 역설을 드러내며 물질문명과 인간성 상실의 비례성을 비유한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문명의 눈부신 발전과 거대하고 참혹한 전쟁, 대량 학살이 보여준 인간성의 말살, 냉전 시대의 부조리 등을 목도한 번치는 “필립 K. 딕의 천재적 착상, E. E. 커밍스의 기이한 시문을 한데 모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극의 궤도에 오른 당시의 세태를 경고한다. 전쟁과 쾌락, 공포와 증오, 감시와 통제의 디스토피아를 예견한 그의 통찰은 동시대 어떤 작가보다도 첨예하다.
핵전쟁으로 파괴된 지구를 무대로 한 ‘모데란’의 단편들은 대부분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과학소설 잡지의 선구격인 『판타스틱Fantastic』과 『어메이징Amazing』에 발표되었고, 이후 일부 단편을 추가하여 1971년에 단편집 『모데란』으로 출간되었다. 그 이후로도 번치는 사망하기 전까지 장르와 주류 문학의 경계선상에서 ‘모데란’ 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며, 평생에 걸쳐 모데란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만큼 『모데란』은 작가 필생의 역작이자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성찰이나 다름없다. ‘시대를 앞선 예언자이며 소외된 선구자’ 데이비드 R. 번치 탄생 100주기를 맞아 비로소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모데란』의 출간은 “우리가 그의 업적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문학적 진보의 증거다. 오랫동안 번역본을 기다려온 국내 SF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 지은이 데이비드 R. 번치 David Roosvelt Bunch
1925년 8월 미국 미주리주 라우리시티에서 태어났다. 센트럴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2년을 수학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1973년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미 국방성 지도국에서 지도 제작자이자 지도 차트 편집자로 근무하며 소설 집필을 병행했다. 1957년 『이프IF』지에 첫 SF 단편을 수록하고 이때부터 1997년까지 100여 편이 넘는 단편을 다양한 잡지에 기고했다. 작가로서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7년에 출간된 할란 엘리슨의 단편선 『데인저러스 비전Dangerous Visions』에 작품 두 편이 수록되면서부터였고, 이후 발표한 단편집 『모데란』(1971)과 『번치!』(1993)는 평단의 호응을 얻었다. 두 번째 작품집인 『번치!』는 1994년 로커스상과 필립 K. 딕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다가 2000년 5월 29일 7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마지막 작품인 시집 『마음을 앓는 자와 창고지기The Heartacher and the Warehouseman』가 출간되고 한 달 후의 일이다.
■ 옮긴이 조호근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를 졸업하고 과학책 및 SF, 판타지, 호러소설 등 장르소설 번역을 주로 해왔다. 옮긴 책으로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헬로 아메리카』 『콘크리트의 섬』 『밀레니엄 피플』,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마겟돈』,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너희 모든 좀비는』 등이 있다.
오래된 미래의 서사, 모데란이 돌아왔다!
‘긴박한 시의성’과 ‘선견지명’이 담긴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데이비드 R. 번치는 가장 난해하고 시적인, 그리고 가장 음울하고 절망적인 SF를 쓰는 작가로 괴짜들만 모인 문학계 변방에서도 가장 괴짜라 할 수 있는 ‘아웃사이더’였다. SF 문학의 세계적 거장 할란 엘리슨의 상징적인 단편선 『데인저러스 비전Dangerous Visions』에 두 편의 ‘모데란’ 단편이 수록된 유일한 작가라는 영예를 거머쥐었음에도 번치는 설득력을 빼앗긴 불행한 예언자 카산드라처럼 ‘괴짜’로 폄훼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한 악몽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는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을 기후 변화와 사회 양극화, 혐오와 극단주의로 대체하면 심리학적뿐 아니라 은유적으로도 현대의 우리가 맞이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번치의 단편을 수록하려고 10년을 기다렸다”고 밝힌 할란 엘리슨을 위시하여 “마치 니체와 휘트먼이 합작하여 써내려간 듯하다. 과학소설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던 브라이언 올디스, “이 얼마나 강렬한 집중이며, 놀라운 독특함이며, 다이아몬드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반짝임인가” 하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등의 작가뿐 아니라 셀레 골드스미스, 주디스 메릴과 같은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자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번치는 사실상 대중에게 잊힌 작가가 되었고 최초의 『모데란』 판본 또한 오래전에 절판되었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작가-독자(남성)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여기는 독특한 관점” 때문에 당시에는 평가절하되었던 『모데란』은 1980년대 번성하는 사이버펑크 소설의 모태가 되었고, 초판본은 수십 년간 과학소설 열혈 팬들 사이에서 진귀한 수집품이 되었다.
약 50년 만에 복간되는 이번 『모데란』의 출간은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출판사의 철학과 뚝심이 만들어낸 결과이지만, 이를 십수 년간 꾸준히 모색해온 네뷸러상 수상작가이자 〈서던 리치 시리즈〉의 작가 제프 벤더미어의 역할도 크다. “그의 작품에 담긴 해학, 직관, 활력, 공감, 그리고 드물지만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순간들은, 가장 끔찍한 어둠 속에도 한 줄기 빛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와 함께 『모데란』의 서문을 장식한 그는 소실될 뻔한 고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과학소설의 계보를 다시금 써내려간다.
“사나이의 목표와 사나이의 관점을 가진 사나이의 나라,
우리는 전쟁과 쾌락만을 위해 살아간다”
대지는 플라스틱으로 뒤덮였고, 플라스틱 땅바닥에서 스위치만 올리면 금속 나무와 꽃이 튀어나온다. 증기 방어막이라는 인공 하늘에서는 계절에 맞춰 형형색색의 빛을 내리쬐고, 엔진을 부착한 금속 새들이 하늘을 장식한다. 전쟁으로 인해 공기와 물이 독으로 변하고 지구상의 생명이 멸종 위기에 처하자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자리를 기계로 대체하고, 자신들의 피와 근육과 살점마저도 금속으로 교체하며 ‘신금속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도 혈육의 금속 교체율이 가장 높은 이가, 가장 뛰어난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오직 젊은 남성만이 “사나이의 목표와 사나이의 관점을 가진 사나이의 나라” 모데란 성채의 주인이 된다.
한편, 성채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올데란Olderan’에 모여 살아가는 가는데, 특히 “아홉 달의 끔찍한 금속 교체 수술을 견딜” 만큼 강인하지 않은 “잔소리쟁이” 여성들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하얀 마녀의 계곡’으로 이주 및 감금되어 살아간다.
이렇게 모든 권력과 통제권을 손에 쥐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모데란의 신금속 인간들에게 삶의 목표란 오직 전쟁과 쾌락뿐! 전쟁을 벌이지 않는 동안에는 전쟁의 계획을 세우거나 신금속 인형(섹스 로봇)과의 ‘충직한 쾌락’을 즐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기면서도 그들은 전쟁이 중단될 때마다 찾아오는 권태와 공포에 몸서리친다. 심지어 섹스 로봇이 보이는 열정마저도 두려움으로 느낀다. 무엇이 그들을 여전히 의심케 하고 증오하게 하며 두렵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결국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마치 니체와 휘트먼이 합작하여 써내려간 듯하다!”
가장 시적이며 서정적인 텍스트 속에 담긴 가장 철학적인 질문들
앞서 언급했듯이 『모데란』은 난해하면서 시적이다. 더욱이 공감하기 힘든 극도의 호전적인 전쟁광의 서술 시점은 독자를 괴롭고 불편하게 한다. 이렇게 주제와 문체와 시점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독자는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고 책에 어렵게 다가간다. 제프 벤더미어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번치가 노린 점이다. “긴장을 푸는 순간 그의 글이 그려내는 미래의 모습은 일반화될 것이며, 누구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가정들을 용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데란』에 처음 진입하는 과정은 힘들 수 있지만, 일단 진입 장벽을 넘고 나면 그 안의 이야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과장되고 과격한 문체, 그로테스크한 신체 훼손 묘사, 등장인물들의 호전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방어적이고 피해망상적인 내면, 거짓된 모조품을 향한 한계를 모르는 칭찬,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은연중 엿보이는 조소와 절망까지”, 이 모든 것이 모데란이라는 극단적인 세계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모데란』은 근본적으로 줄거리 기반 소설이라기보다는 인물 탐구에 가까우며, 성채 주인의 주절거리는 대사야말로 작품의 강점이 발휘되는 곳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성채의 주인은 점점 친숙한 인물이 된다.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은 터무니없고 환상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과 주변 세계로부터 느껴지는 이질감은 점차 줄어든다. 책이 끝날 즈음이 되면, 모데란의 세계와 금속 주인공은 우리의 현실로부터 겨우 몇 발짝 떨어진 존재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익숙함이야말로 번치의 풍자가 발휘하는 효력이며 번치의 미래상이 품은 주제의 힘일 것이다.
■ 추천의 글
내가 대단히 경탄하는 작품의 작가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가 받아 마땅한 찬사를 받지 못한 작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번치는 어쩌면 여기 소개하는 모든 작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예언가일지 모른다. 그는 미래상을 수수께끼, 난제, 질문, 우화의 형태로 써낸다. 그리고 작품을 풀어내는 일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_할란 엘리슨, 《데인저러스 비전》에서
기막힌 작품입니다. 나는 SF계의 이정표라 할 만한 작가들 중에서 오랫동안 번치가 가장 과소평가되었다고 여겨 왔습니다. ……이 얼마나 강렬한 집중이며, 놀라운 독특함이며, 다이아몬드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반짝임인가요. _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어슐러 K. 르 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위대한 작가들은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완수한다.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다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하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는 일상 너머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이들은 우리를 본질적으로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그의 단편에 다가설 때마다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데이비드 R. 번치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_제임스 샐리스
과학소설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작품이다. 마치 휘트먼과 니체가 합작하여 하인라인-앤더슨-니븐-푸넬의 전형적인 미래사 단편을 써내려간 듯하다. _브라이언 올디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번치의 미래상이 품은 주제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 내러티브는 신금속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는 것처럼 강렬하다. _『커커스 리뷰』
제프 밴더미어의 통찰력 있는 서문은 번치의 표현 양식에 대한 귀중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로봇이 지배하는 미래를 바라보는 강철처럼 탄탄한 관점이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번치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데에는 그의 경쾌하고 인상에 치중하는 언어에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사유와 사회 비판, 그리고 마초이즘의 확실성을 추구하려 어리석음의 극단에 도달하는 인간을 향한 끝모를 경탄을 매력적으로 혼합해내고 있다. _ A.V.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