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의 종합출판 브랜드 폴라북스에서 필립 K. 딕 걸작선에 이어 새로운 과학소설(SF) 총서 ‘미래의 문학’이 출범했다. 이 총서는 시공사 그리폰북스, 열린책들 경계소설선,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등을 기획하며 꾸준히 해외 SF를 소개해온 평론가이자 번역가 김상훈 씨의 책임기획으로, 문학사적인 의의와 읽는 재미를 겸비한 해외 과학소설의 고전과 최신작을 충실한 해설을 곁들여 체계적으로 소개할 의도로 기획되었다. ‘미래의 문학’ 총서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던 전설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아너 해링턴 시리즈의 첫 작품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SF 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라이벌이자 비평가로서도 명성이 높은 새뮤얼 딜레이니의 대표작 『바벨-17』, 여론조사에서 일본 작가가 쓴 역대 최고의 SF소설로 선정된 고마츠 사쿄의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아메리칸 매직 리얼리즘의 대표주자 루셔스 셰퍼드의 수상 작품집 『재규어 헌터』,최첨단 SF의 기수 그렉 이건의 『디아스포라』, 3대 장르문학상을 30여 번이나 수상하며 미국 SF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성작가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명예의 파편』『바라야』 등의 작품을 앞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와 같이 고전과 최신 명작을 아우르는 1차 출간 예정작이 폴라북스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polabooks296)에 발표되자마자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에 오르며 독자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총 열 작품으로 예정된 ‘미래의 문학’ 총서에서 첫 번째 주자로 선정된 작품은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콜린 윌슨의 철학 SF 소설 『정신기생체』이다. 콜린 윌슨은 ‘실존주의적 위기’라는 관점에서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헤밍웨이, 헤세, 반 고흐, 쇼,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저작물을 폭넓게 분석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웃사이더』의 저자로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다.
『정신기생체』는 영국의 고고학자 길버트 오스틴의 수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오스틴이 대학 동창인 심리학자 카렐 바이스만의 불가해한 자살 소식을 접하고 친구였던 바이스만의 유언에 따라 한 무더기의 원고를 상속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자살과 원고는 인류 진화와 ‘정신기생체’의 비밀에 얽힌 거대한 변화의 단초에 불과했다.
『정신기생체』는 20세기 환상문학의 거인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에서 영감을 얻은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의 기본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쓴 독특한 작품이다. SF와 호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읽는 재미????라는 현대적인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품격을 갖춘 걸작으로, 출간되자마자 유럽,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유사 작품의 창작을 촉발하였다. 『정신기생체』는 벨리코프스키에서 구르지예프까지, 서양 은비학隱秘學과 유사과학을 총망라하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 의식의 무한한 잠재력과 양면성에 대한 윌슨의 신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 차례
등장인물 ...5
작가 서문 ...11
머리말 ...33
정신기생체 ...35
해설 ...332
■ 지은이 _ 콜린 윌슨 Colin Wilson
콜린 윌슨은 1931년 6월 26일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셔 주의 주도인 레스터에서 노동계급 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처음으로 글을 읽는 법을 배운 뒤로는 독서에 몰두했고, 자연과학, 심리학, 철학 서적에서 《위어드 테일즈》와 《안락의자 과학》 등의 펄프잡지까지 닥치는대로 탐독함으로써 광범위한 교양을 쌓았다. 16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생계를 위해 모직 공장에 취직했고, 단조로운 공장의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T. S. 엘리엇을 위시한 위대한 영국 시인들의 시에 탐닉했다. 그 뒤에는 실험실 조수와 세무서 공무원 등으로 일하다가 영국 공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단조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제대한다.
1950년대는 농장일이나 도랑을 파는 뜨내기 인부로 생활비를 벌며 독서를 계속했고 이때 읽은 『바가다트 기타』에 촉발되어 시작한 명상은 윌슨의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해 여름에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미국인 철학자 레이먼드 덩컨을 만나 잠시 교류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인 레스터로 돌아와서 여러 직종을 전전하며 데뷔작인 『어둠 속의 의식』(1960)과 문학 평론 등을 쓰기 시작했다.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창작에 전념하려고 작심한 윌슨은 낮에는 마르크스와 쇼가 집필을 했던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서 자료를 찾아가며 『어둠 속의 의식』을 썼고, 밤이 되면 근처의 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방수 침낭 하나만 가지고 노숙을 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콜린 윌슨은 『어둠 속의 의식』 집필중 그 이론적 기반이 된 문학 평론 부분을 독립시켜서 『문학의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의 비평서를 쓰기 시작했다. ‘실존주의적인 위기’라는 관점에서 카프카, 카뮈, 헤밍웨이, 헤세, 로렌스, 반 고흐, 쇼, 니체, 도스도옙스키의 저작물을 폭넓게 분석한 이 책은 1956년 5월에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자마자 문단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윌슨은 에디스 시트웰과 필립 토인비를 위시한 비평가들의 격찬에 힘입어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자신이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지식인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다음 해 두 번째 아내인 조이와 함께 콘월 주로 낙향했다. 그 이래 그는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양사, 범죄사, 철학, 심리학, 종교, 성과학, 신비주의, 오컬트 SF, 미스터리, 스파이소설, 전기, 초일상적 현상, 초(超) 고대사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120여편의 저작물을 발표했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재인(才人)이자 대중 저술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밖의 대표작으로는 『패배의 시대』(1959),『문학과 상상력』(1962),『성욕의 기원』(1963),『아웃사이더를 넘어서』(1965) 등의 문학 비평서와, SF 소설인 『현자의 돌』과 『스파이더월드』4부작(1987-2002), 논픽션인 『오컬트의 역사』(1971) 등이 있다.
■ 옮긴이 _ 김상훈
서울 출생. 필명 강수백. 번역가이자 SF 평론가이며 시공사 그리폰 북스와 열린책들 경계소설 시리즈,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시리즈의 기획을 담당했다. 주요 번역 작품으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드림 마스터』,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그렉 이건의 『쿼런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 새뮤얼 딜레이니의 『바벨-17』, 필립 커의 ‘베를린 누아르’ 3부작 등이 있다.
■ 줄거리
1994년. 영국 고고학자인 길버트 오스틴은 대학 동창인 심리학자 카렐 바이스만의 불가해한 자살 소식을 접하고 바이스만의 유언에 의해 그가 쓴 한 무더기의 원고를 상속받는다. 광산회사의 의뢰를 받고 터키에서 발견된 지하의 거석巨石 유적을 발굴하던 오스틴은, 상상을 초월한 초고대의 지층에 파묻혀 있는 이 유적과 실존하는 미국의 괴기소설작가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 사이에 놀랄 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실마리를 찾아 비로소 친구가 남긴 원고를 읽기 시작한 오스틴은, 친구의 죽음 뒤에 18세기 이래 인류를 무지와 혼돈과 전쟁에 빠뜨리고, 예술가와 선각자들을 자살과 광기로 몰아넣음으로써 거기서 발생한 정신적 에너지를 흡혈귀처럼 빨아먹으며 살아온 정신기생체들의 암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스틴은 함께 유적을 발굴하던 라이히와 함께 그들에게 대응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기생체들의 마수가 뻗쳐오고 있었다……
■ 이 책은……
소설 형식으로 아웃사이더 철학을 전개한 걸작
콜린 윌슨은 데뷔작 『아웃사이더』에서 카프카, 카뮈, 헤밍웨이, 헤세, T.E. 로렌스, 반 고흐, 쇼,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저작에 나타나는 일탈적인 인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반사회적 타자라는 범주로만 묶이던 수많은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에게 일종의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적 위기’라는 철학적 화두를 통해 보수적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전후의 비평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 이후 10년이 지나서 쓴 『정신기생체』(1967)는 아웃사이더 체험에 대한 직접적이며 역사적인 사변을 SF의 형식을 빌려 전개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정신기생체』에서 윌슨은 “절대다수의 인간이 스스로의 엄청난 잠재력을 1퍼센트도 채 발휘하지 못한 채로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은“ 18세기 이래 인간이 ‘마음의 암’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이 심암의 원인으로 지목된 ‘정신기생체’는 SF 특유의 은유와 직유가 교차하는 영역에서 태어난 매력적인 외계의 ‘괴물’인 동시에, 우리의 삶과 정신을 실제로 지배하는 무미건조함과 지적인 나태함에 대한 통렬한 규탄이기도 하다. 윌슨은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20세기 들어 자살과 우울증이 급증한 것은 산업화의 부작용 때문이 아니라 ‘실현되지 못한 인간 잠재력의 복수’로 인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위시한 20세기 실존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후설의 현상학現象學에 대한 독창적인 고찰에서 비롯한 것으로, 소설 내에서 주인공 오스틴이 ‘정신기생체’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또한 후설의 현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와 뉴웨이브 SF의 팬이 쓴 장르 오마주, 그리고……
『정신기생체』가 발간된 1967년은 SF사史적으로는 J. G. 발라드와 마이클 무어콕을 중심으로 영국발 뉴웨이브 운동이 맹위를 떨치고,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K. 르귄, 필립 K. 딕 등의 젊은 미국 작가들이 세대 교체를 거쳐 새로운 시대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중요한 시기였다. 문학 비평으로 등단한 콜린 윌슨은 언제나 SF계의 이런 조류 바깥에 서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 장르를 애독해온 독자였다. 『정신기생체』는 과학소설인 동시에 20세기초 미국의 괴기소설 작가이자 지금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H. P.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윌슨은 비평서 『문학과 상상력』에서 러브크래프트를 너무 폄하했다는 미국의 원로 작가 어거스트 덜레스의 항의를 받고 이 소설을 쓰려는 영감을 받았으며, 작가 서문에서 직접 밝혔듯이 콜린 윌슨 본인도 러브크래프트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과학기술이나 세계 정세는 출간한 지 반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보면 소박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자살과 우울증과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암흑면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21세기를 현실세계의 정신기생체들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섬뜩하게 예언적이다. “깊이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한다고 해서, 그것을 건강함의 척도로 볼 수는 없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경구처럼 말이다.
■ 본문 중에서
어느 출판사의 카탈로그에서 아컴하우스+의 주소를 알아내서 러브크래프트의 책 중 입수 가능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내 저작에 관해 알고 있던 어거스트 덜레스에게서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그 편지에서 덜레스는 몇 가지 지적을 해주었고, 그 결과 『문학과 상상력』 미국판의 러브크래프트 관련 부분에 나는 몇 군데 수정을 가했다. (덜레스는 여전히 이 책이 러브크래프트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덜레스와 서신 왕래를 하던 중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흐음, 당신이 러브크래프트에 관해서 그토록 비판적이라면, 직접 소설을 써보고,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지 확인해보면 어떻습니까…….” - 15쪽
작가 자신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그 결과 독자들까지 소름 끼치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뭔가를 생각해내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방식의 실존주의를 다룬 어떤 책에서 현상학現象學을 다룬 장을 집필하고 있었을 때, 해결책이 떠올랐다 ? 마음 속의 괴물을 등장시키기로 하자……. 그 결과 나의 첫 번째 과학소설이 탄생했다. - 16쪽
이쯤 되면 내가 왜 러브크래프트에게 그토록 친근감을 느끼는지, 본서가 왜 반은 장난스럽고, 반은 애정에서 비롯된 존경의 표시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나 자신도 러브크래프트적 전통의 후예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사람들보다는 책을 상대할 때가 더 마음이 편하고, 독서의 결과를 쏟아붓고 형이상학적 구조에 입각한 정교한 신화를 고안함으로써 작품에 진실미를 부여하는 작업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기묘한 미지의 힘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깊은 관심과, 프랑스 혁명 이래 왜 인류는 그토록 다수의 ‘아웃사이더’를 갑자기 배출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을 결합했다. - 29~30쪽
라이히는 불과 십 분 만에 나를 낙관적이고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차토구아인들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 55쪽
덜레스가 보낸 책들이 들어 있는 소포가 마침내 도착했던 탓이다. 「시간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펼쳐보자마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지하에 묻혀 있는 거대한 석재들에 관한 묘사와 맞닥뜨렸다. 그동안 반대편 안락의자에 앉아 다른 책을 뒤적이던 라이히는 놀란 듯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곧 큰 소리로 한 문장을 읽었다. “이 암흑 속에 사는 자는 뇨그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로 전날 저녁에 ‘압호스 석재’에 각인된 비명을 시험 삼아 번역해보았는데 “말들은 두 마리씩 뇨그타의 앞으로 대령될 것이다”라는 해석이 나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라이히에게 「시간의 그림자」에 나오는 지하 도시들의 묘사를 읽어줄 차례였다. “반半 폴립 상狀의 장로 종족에 의해 건설된, 문이 없는 높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위대한 현무암 도시들.”
러브크래프트가 모종의 기묘한 방법을 통해 우리의 발견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88쪽
한편 나는 과거의 인격과 그 전제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신의 대륙으로 진입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던 탓에, 내가 여전히 몇 십 개에 이르는 일반적인 전제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정체성이 변했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은 매우 깊은 해저에 박혀 있는 닻으로부터 온다. 나는 여전히 나를 인류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여전히 나를 태양계의 주민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일부로 간주한다. 시간과 공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에 어디로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느낀 적은 없다.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나중에 탐구해도 될’ 문제였으므로.
지금 정신기생체들은 이렇게 깊은 곳에 계류되어 있는 내 정체성으로 접근해서 뒤흔들고 있었다. -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