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시가 안 써져 우울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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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회

지금까지 연재를 쓰는 동안 내가 꽤 우울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을 줄은 몰랐다. 마치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랄까? ‘삐빅, 당신은 우울한 사람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수록, 상담을 받을수록 우울한 사람과 우울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노파심에 미리 말하는 거지만 나는 우울에 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엔 나의 이야기, 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울해서 시를 쓴다. 아닌가. 시를 써서 우울했던가? 알 수 없지만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그 상황을 기록하고 시로 만든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요즘엔 시가 안 써져서 우울하다. 이것 참 큰일이다. 과연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종 수업을 하다보면 수강생분들께서 심오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죽음이라든가. 삶이라든가. 우울이라든가. 정리해보자면 시는 굉장히 우울한 작업 중 하나이며, 그래서 시를 쓸 때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다 보니 덩달아 삶은 무엇일까 하는 필연적인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엔 그 생각을 어떻게 시 안에 녹여낼 수 있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사실 어떤 질문을 받든 조금 망설여지긴 한다. 나의 대답이 모든 시인의 대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답을 해본다. 그러면서 왜 시는 우울할까? 정녕 행복한 시는 없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 되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있다. 행복하고 밝고 희망찬 시들도 있다. 그런 순간을 시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한 날을 시로 옮기면 별로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 행복할 때 누군가는 행복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엔 모를 수 있지만 적어도 시로 옮겨 적을 땐 알 수 있다. 문학을 하다보면 행복한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 시선이 더 갈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우울한 것일까? 나아가 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멀리 있는 죽음이 아니다. 내게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여름에 보이는 매미들, 겨울에 녹아가는 눈들, 떨어지는 나뭇잎들, 낙상사고 주의 표지판, 사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구급차 소리, 집 앞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운구차. 횡단보도에 그려진 현장 보존선,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와의 통화에서도 죽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모든 죽음의 당사자가 내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죽음들을 목격하고 있다. 멈춰 있는 죽음도, 조금씩 움직이며 이동하는 죽음도,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죽음도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책에서도, 그걸 능가하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햄릿의 독백이 괜히 유명한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우리는 죽음 아니면 삶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삶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포착하며 파고드는 것이 시인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 시를 쓸 순 없다.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 안에서 어떤 상황을 만들 때,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령 산책을 하는 상황을 시로 써본다고 해보자. 산책하는 사람의 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울고 있다고 해보자. 우는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는 어떤 의자인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나무 의자, 철제 의자, 플라스틱 의자 등등.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울고 있는 이유는 뒤로 미뤄놓고, 그 사람을 위해 산책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그가 편히 울 수 있도록 나무 뒤로 숨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다가가 휴지를 건넬 수도 있다. 그가 떠날 때까지 바라만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아주 큰 나무 밑에 우는 사람을 둘 수도 있고, 곧 철거될 나무 밑에 우는 사람을 둘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내가 선택한 것들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무엇에 생명을 부여할 것인가를 생각하다보면 무엇을 없애고 탄생시켰는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시를 쓰는 순간 탄생과 죽음을 무한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쓰인 문장보다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님은 우울할 때 시가 더 잘 써지나요? 아니면 행복할 때 더 잘 써지나요? 그런 질문에 너무 행복해서도, 너무 우울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엔 그냥 안 써져서 큰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는 안 써지고 우울하기만 합니다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써봐야지요. 언제나 시로 쓰인 순간과 문장들보다 쓰이지 않은 순간과 문장들에 관해 생각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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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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