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죽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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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회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다. 조용히 내 밑으로 와 구석구석 냄새를 맡는다. 나는 조심스레 만져도 괜찮을까요? 물어보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사람을 좋아해서 괜찮을 거라는 말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본다. 강아지는 한동안 내 품 안에서 사랑을 받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다. 친구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보자고 했는데, 와보니 애견동반카페였고, 나는 처음 본 강아지와 함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주인과 함께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있다. 대개 이 카페로 들어오거나 그러지 않으면 문 앞에서 인사만 나누고 다시 갈 길을 가는 것 같다. 그 사이로 친구가 오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외향적인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풀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닐까. 만나기로 한 사람이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난다면 빠르게 알아차리게 된다. 마치 강아지가 다른 사람의 냄새를 열심히 맡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왜 이렇게 차분하지? 무슨 일이 있었어? 나는 넌지시 물어보고, 친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잘 들어줘야겠다고 다짐한다.

 

풀 죽은 외향인과 풀 죽은 내향인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둘 다 조심스럽게 힘들었던 일들을 꺼내긴 하지만 내향인은 입 밖으로 꺼내면서도 생각을 하는 게 보인다. 생각의 생각으로, 또 다른 생각으로 계속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때는 말을 하면서 본인이 알아서 정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풀 죽은 외향인, 그러니까 내 친구의 경우엔 인간관계에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관계,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인간은 어렵고, 관계는 더 어렵다. 정말 잘 모르지만 그래도 친구에 관해서는 알고 있기 때문에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네본다. 무엇보다 풀 죽어 있는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아닐까 싶어 강아지에게 하는 것마냥 잘한다, 잘한다를 끊임없이 덧붙여본다.

 

친구의 고민을 듣다가 두 마리의 강아지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강아지도 내향적인 강아지와 외향적인 강아지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을 처음 보았지만 비교적 내향적인 강아지는 주인 옆에 가만히 있었고, 외향적인 강아지는 이곳저곳 다 돌아다니며 냄새도 맡고, 간식도 얻어먹고 있었다. 어쩐지 주인 옆에 가만히 있는 강아지가 신경이 쓰였다. 나는 친구에게 말하는 도중에 정말 미안한데 저 얼어 있는 강아지를 한 번만 봐달라고 말했고, 친구는 강아지를 보더니 잠시 고민을 잊은 듯이 강아지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아무튼 그랬다고, 들어줘서 고맙다고 실없이 말한다. 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지지만 무엇보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잘하고 있어, 이런 말을 듣고 싶을 때도 있다. 친구는 처음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한결 밝아진 느낌이다. 친구는 말하고 나니 괜찮아졌다고 말한다. 듣는 이에겐 한없이 귀한 칭찬이다.

 

친구는 돌아가는 길에 네 컷으로 된 스티커 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고 한다. 그걸 찍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질까?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또 하자고 하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다. 표정이 한결 좋아진 친구를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타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일 때가 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오늘 풀이 죽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풀이 죽어 있었나?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풀 죽은 친구의 이야기를 먼저 듣느라 정작 나의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서 아까 찍었던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친구의 표정은 정말 행복한 강아지가 따로 없다. 창밖으로 종종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낮에 내 품 안에서 잠든 강아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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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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