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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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회

며칠 전 시골에서 밥을 먹는 꿈을 꾸었다. 시골에 내려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는데 말이다. 시골 안방에서 자고 있다가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해서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친척들이 다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흰 떡 위에 파와 김가루가 잘게 뿌려져 있는 떡국이었다. 마당에선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 강아지가 그들을 보고 짖는 소리, 아이들에게 어서 빨리 나가서 인사하라는 소리. 누군지 확인은 못 한 채 꿈에서 깼지만 아마도 작은집 식구들이었을 것이다.

 

꿈에서 깨고 달력을 보니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설날에 본가와 시골에 내려가지 않을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일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은 이제 추억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 집에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마당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부모님을 따라 세차를 함께 한 적도 있었고,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피를 본 적도 있었다. 아직 무릎에 영광의 상처처럼 남아 있다. 놀러 온 고양이에게 밥을 준 적도 있었고, 함께 꽃을 심은 적도 있었다. 아주 큰 목소리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른 적도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서 소중한 것들을 태우기도 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시골에서 나는 냄새와 시골에서 먹는 음식, 시골에서만 들리는 풀벌레 소리, 시골집 분위기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시골집에는 늘 초코파이와 요구르트가 있었다. 혹여나 손주, 손녀들이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할까봐 할머니께서 미리 준비하신 거였다. 지금도 종종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를 보면 할머니가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런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집은 명절 당일에 꼭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꽃놀이였다. 성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 들러 폭죽을 사고 밤이 되면 마당에서 다 같이 불꽃놀이를 했었다. 친척 언니와 오빠, 동생들은 당연히 좋아했지만, 나는 정자에서 웃고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내게 몇 안 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웃는 모습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확실히 시골집에 가는 횟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시골집은 얼마 전에 도둑을 맞았다고 했다. 친척 어르신들이 그 집을 갔을 땐 집 안 곳곳이 헤집어져 있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사진이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가져갈 것이 많지 않아서 작은 액세서리 정도 사라졌다고 하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친척 어르신들은 도대체 시골에 훔쳐 갈 게 무엇이 있다고 도둑이 들었을까 했지만,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는 무언가를 상상하기가 싫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자신이 50년 넘게 살았던 집에 도둑이 든지 모르고 계신다. 아마 평생 모르시지 않을까 싶다.

 

며칠 전 할머니와 통화를 했다. 이번 명절에 내려가지 못해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먼저 전했다. 할머니는 이제 내게 결혼 이야기, 공부 이야기, 돈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 본인이 얼마나 많이 아픈지에 관한 이야기만 하신다.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더 자주 전화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이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죽음을 무서워하면서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몇몇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죽음이 무서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할머니를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내게 이제 남아 있는 조부모님은 할머니뿐이다. 할머니가 만약 돌아가시게 된다면 시골집에 관한 기억도, 어린 시절의 내 모습도 정말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지난 추석 땐 집 앞 시장에 가서 송편을 사서 돌아왔다. 이젠 명절 음식을 사서 먹거나 혼자서 해 먹는다. 전이나 튀김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해주신 맛과 너무 다르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를 포함해 시골집에 관한 추억이 점점 사라지는 게 싫다. 무서워하고 있는 사람은 할머니뿐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명절에 서울에 있으면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는데, 종종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본다.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주 조용히 빠져나와 그들과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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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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