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강렬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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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회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여러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많았나? 그래서 질문을 많이 했었나? 아니면 혼자 골몰히 생각하다 말을 아꼈나? 누군가의 앞에 설 때 부모님 뒤에 숨어 한없이 부끄러워했나.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다가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말은 많았다. 정확히는 말하는 걸 좋아했다. 타고난 기질도 있었을 것이고, 주어진 환경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할머니는 내가 또래보다 말을 빨리 깨우치길 바라서 계속해서 말을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꽤나 어렸을 때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서로 주고받았던 말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할머니한테서 많은 걸 배웠다. 예절도,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도,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의 마음가짐도, 무한한 사랑도 모두 할머니한테서 배운 것들이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꽤나 강렬한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 하나는 할머니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서워하는 뱀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각자 무서워하는 것들이 다를 테지만 나는 특히나 뱀을 무서워한다. 보통 무서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분명 이유가 있다.

 

때는 초등학교 입학 전 여섯 살 때로 돌아간다. 당시 살고 있던 지역에서 20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할머니가 가꾸던 논밭이 나왔다. 그곳은 도시의 외곽으로 아직 개발 전이었기 때문에 비포장도로 하나만 있었고, 도로 양옆으로 논밭이 아주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논밭은 생각보다 넓었고, 할머니가 고개를 숙이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위험한 공간이라 할머니는 비포장도로에 나를 놔두고, 여기에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논밭으로 사라지셨다. 비포장도로의 끄트머리에는 임의로 만든 작은 계단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경계 삼아 내가 가면 안 되는 곳과 가도 괜찮은 곳을 분리시켰다. 그곳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차 트렁크에서 그 광활한 논밭을 보는 게 좋았다. 바람에 따라 한쪽으로 벼들이 움직이는 게 좋았다. 조금 심심하긴 했어도 비포장도로를 따라 왔다 갔다 산책하는 게 좋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비포장도로 한가운데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뜸 할머니가 양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그 신호가 할머니의 안부 신호라고 생각해서 나 또한 최대한 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오른쪽을 가리키며 내 이름을 크게 외쳤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열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뒤늦게 내 쪽으로 뱀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 봐도 뱀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있는 힘껏 죽어라 달렸다. 할머니가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줄도 모르는 채 계속해서 달렸다. 비포장도로의 끝은 아스팔트 도로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까지 달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의 슬리퍼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고, 뒤를 돌아보니 뱀이 코앞에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뱀의 얼굴은 정말 사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뱀은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공격하진 않았다. 뱀은 한참을 쳐다본 뒤에야 옆 논밭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꿈을 꾼 것처럼 아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때 뱀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내가 아주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니면 너 이 새끼 내가 한번 봐준다 하는 마음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내겐 아주 강렬한 기억 중 하나이다.

 

그런데 커가면서 생각할수록 뱀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뱀이 사라지고 난 뒤에 뒤이어 달려온 할머니는 얼어버린 나를 꼭 안아주면서 연신 괜찮다고 해주었다. 차로 데려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주었고, 바로 집으로 가 따듯한 물로 목욕을 시켜주었다. 그 뒤로 나는 두 번 다시 논밭에 갈 수 없었지만, 삼촌과 이모에게 뱀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아주 용감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논밭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어른들은 뱀 이야기를 꺼내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한번은 할머니의 묘 근처에서 뱀의 허물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죽은 이가 영물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나비나 고양이, , 뱀 등등. 글쎄, 무엇일지 알 순 없지만 무엇이든 할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심지어 뱀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뱀을 만났던 그날의 기억은 내게 아주 무서운 기억이기도 하지만 꽤나 신비롭고 이상한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잊고 싶지 않은 할머니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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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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