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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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회

작년 여름은 너무 더워서 힘들다고 그랬는데 벌써 겨울이 왔네. 너는 겨울에 태어나서 겨울이 가장 좋다고 그랬지. 네가 태어난 날 눈이 많이 내려서 낭만적이라고 말한 적 있었지. 크리스마스 부근에는 눈이 내렸어. 생각보다 많이 내리는 눈에 나도 모르게 설렜던 것 같아. 눈을 맞으면 아주 잠시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아. 아주 익숙했던 곳인데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거 있잖아.

 

어렸을 때 길을 걷다 아주 큰 눈사람을 본 적이 있어. 너무 커서 정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눈사람이었어. 단추를 달고 모자를 쓴 눈사람은 웃고 있었어. 나는 그 눈사람이 눈사람 아저씨에 나오는 눈사람처럼 밤이 되면 나를 데리러 올 줄 알았지. 함께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날 밤새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서 부모님에게 혼났어. 아직도 가끔 눈사람 아저씨를 기다려. 그래서 나는 눈 오는 날을 기다리는 거야.

 

문제는 눈이 다 내리고 나면, 그러니까 바닥에 쌓였던 눈이 다 사라지고 나면 우울이 찾아온다는 거야. 연말이라서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내게 우울이 찾아온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아. 우울은 늘 곁에 있어. 어제 입었던 옷에도, 항상 베고 잤던 베개에도, 재작년에 사고 한 번도 쓴 적 없는 엽서에도, 잘 찾아보면 우울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그게 잘 보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잘 보이지 않는 날도 있을 뿐인 거지. 쓰다 보니 연말은 정말 핑계 같네.

 

사람들은 이제 새해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글쎄.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새해가 기쁘지 않은 걸까?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보여. 즐겁다는 건 뭘까? 너는 무얼 좋아하더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명확하게 답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책 앞으로 가게 된다. 가끔은 책 속에 답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어떤 문장 속에서, 어떤 장면 속에서 한참을 누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 오늘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소설 한 장면에 나올 법한 집을 발견했어. 크리스마스에 붙여놓은 전구를 아직도 창문에 붙여놓아서 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집이었어. 나는 그런 장면을 보고 따듯함을 느껴. 분명 밖은 추운데 왠지 저 집은 한없이 따듯할 것 같은 그런 거 있잖아. 있지, 너는 언젠가 따듯한 집에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한겨울에도 마음의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집. 언젠가 그런 집에 살게 되면 너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아무래도 나는 너의 마음이 가장 편안했으면 좋겠으니까 말이야.

 

잘 지내. 많이 슬프고 외로울지라도 나는 여전히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편지를 쓰다 보니 새해의 첫날이 가고 있네.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또 추워지고 있어. 그래도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는 건 좋은 것 같아. 가끔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좋네. 다시 올게. 그동안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이 너를 편안하게 하는지 꼭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넌지시 나에게 다시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제 이 말은 꼭 해야겠지. 자기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20240101일 월요일

망원동 퀜치에서

 

 

P.S. 이 편지는 11일에 쓴 편지다. 내가 나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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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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