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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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회

어느 순간부터 밖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매미가 사라졌다. 달력을 보니 벌써 8월 말이었다. 여름 방학 동안 무얼 했더라? 생각하던 찰나에 달력 밑에 조그맣게 써진 처서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처서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로 양력 823(혹은 24)이었다. 아직 여름 날씨이긴 하나 처서가 지나서 그런지 확실히 바람이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궁금해서 24절기를 찾아보니 처서 다음엔 백로였다. ‘백로는 흰 이슬을 뜻했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백로 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24절기를 잘 모르고 자라왔긴 하지만 유래를 찾아보니 꽤나 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대부분의 절기가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알리는 경칩이나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밤의 길이가 길어지고 백곡이 풍성한 때인 추분’,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첫 눈이 내리는 첫 겨울의 징후인 소설.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면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아주 잠시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가 아주 잠시 붕 떠 있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는 것 같다. 알게 된 새로운 단어는 휴대폰 메모장으로 이동한다. 오랫동안 메모장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도 있고, 금세 지워지는 단어도 있다. 언젠간 시에 쓸 날이 있겠지 다짐하며 차곡차곡 단어들을 쌓아 놓는다.

 

한국에는 처서 매직이라는 합성어가 있다. 처서가 오면 마법처럼 더위가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서가 지나면 가을이 온다는 것, 이 말은 슬프게도 방학 또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름 방학 시작 전에 세워둔 계획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어떤 일은 마음먹은 대로 쉽게 실천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여름이라서 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여름을 핑계 삼아 계속해서 미루기도 했다. 매미가 사라진 것처럼 또 한 번의 여름이 간다. 그리고 처서 매직이라는 말처럼 정말로 가을이 오고 있다.

 

여름과 마찬가지로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꽃이나 낙엽같은 자연물을 말하기도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즌 시작인 야구를, 누군가는 추석을 말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가을하면 트렌치코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처럼 트렌치코트를 입은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만 같다. 어쩐지 트렌치코트하면 우수에 젖거나 쓸쓸한 사람,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인물이 떠오르기도 한다. 신기하게 시 안에서 등장하는 계절은 꽤나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시 안에 등장하는 여름과 가을은 (원래 다른 계절이긴 하지만) 너무 다른 느낌으로 존재한다. 비슷한 형식으로 시가 진행되더라도 여름은 공허하고 아련한 느낌이라면 가을은 고독하고 쓸쓸하다고 해야 할까. 무어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름에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가을에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가을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24절기를 보면서 느낀 건 계속해서 절기가 잘 맞아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계절이 뚜렷했으나 지금은 경계가 많이 흐려진 것 같다. 체감상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더 길어진 느낌이다. 사실 내가 느낀 그대로가 맞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후위기가 오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곧 처서 이후에 처서 매직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더 늦지 않게 계절을 보존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기분 탓인지 요즘엔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이젠 뭘 해도 아쉬운 날들밖에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뭐든 마음먹으면 빨리 해야 한다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 그냥 해야 한다고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후회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후회를 하긴 하되 덜 하는 쪽을 선택하여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이러다 한순간에 곧 동지가 올 것이다. 겨울이 꽤나 길게 이어질 것이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을 느껴본다. 제법 쌀쌀하다. 확실히 여름 바람과는 다르다. 이제 곧 한없이 추워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 안으로 몸을 집어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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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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