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한 체력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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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회

제가 준비한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만…….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체력은 한정되어 있고, 체력은 마음의 풍요에서 나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향인에게 밖으로 나가는 약속이란 모두 일이다. 그건 분명 체력을 쓰는 일이고, 나는 이 체력을 잘 배분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혹은 처음 본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다정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일정 조율을 잘 해야만 한다. 예컨대 3일 연속으로 일정이 있다면 나의 체력이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조율을 해야만 한다. 이틀 약속을 나가고 하루를 쉰 다음 다시 밖으로 나간다던가, 혹은 월수금, 화목토 이런 식으로 중간에 쉬는 날을 만들어준다던가. 아무튼 나에게는 체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당일 약속엔 부담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오늘 쉬는 날이라면 무엇을 할지 아침부터 계획을 짜놓기 때문이다. 그 계획에 틀어지는 일은 웬만해선 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이 있다.(이렇게 보면 계획형이라기보다는 정말 통제형에 가까운 것 같다.)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는 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날이라면 더더욱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물론 시를 쓰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그러니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사실 체력이다. 예로부터 공부는 엉덩이 싸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는 것이라고…… 물론 짧은 기간 동안 최대의 효율을 내면 좋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이 조금 길다. 그냥 앉아서 읽으면 좋으련만 왜 이렇게까지 미루고 미뤄서 예정시간보다 훨씬 지난 시간에 읽게 되는 건지. 어느 순간 몰입해서 책을 빠르게 읽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30분이 지나가면 집중력이 흐려져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그때 활자 사이로 들어오는 생각들을 꽤 재밌어 하는 편이다. 전혀 다른 생각이 들어올 때도 있고,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어떤 장면 혹은 어떤 구절, 어떤 단어와 연관된 생각들이 들어올 때도 있다. 공책을 펼쳐 시의 한 구절을 쓸 때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고, 글씨 연습을 할 때도 있다. 그렇게 무언가를 끄적거리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물론 집에서 하루 종일 쉬었다고 해도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시를 쓰고, 책을 읽을 때도 체력은 쉽게 소진된다. 그럴 땐 잠시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물론 이때는 잘 일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눕는 건 쉽지만 다시 일어나는 건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사실 체력은 집에서도, 집 밖에서도 계속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아이에게 오은영 박사님께서 그건 게으른 것이 아니라 긴장감이 높은 것이라고, 그 긴장감을 완화하려고 집에 계속 누워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생각해보면 나는 약속이 있을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건 오늘 만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오늘 만난 사람이 적어도 불편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그 마음에서 오는 긴장감이다. 타인에게 어떤 다정함을 선보이기 위해선 항상 긴장감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 약속이 끝난 후면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가끔은 이상하게 그때부터 힘이 나는 경우가 있다. 분명 준비한 체력을 다 소진했는데 말이다.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휴대폰 배터리도 1퍼센트만 남았을 때 가장 오래가는 것처럼 집에 가면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울 때가 있다. 분명 바로 씻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겠지. 집에 오자마자 바로 씻거나 정리를 한다면 뭘 해도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이상하다. 그런 걸로 따지면 나는 진작에 성공했어야 했는데…….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또 모르겠지만 그냥 나는 귀찮음이 많아서 더 귀찮아지기 싫을 뿐이다.

정말 힘든 상태여도 한강을 지나갈 땐 조금이나마 힘을 내게 된다. 밤을 알리는 가로등의 불빛들과 강물에 비치는 빛들, 그 빛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따듯함이 유독 잊히지 않을 때가 있다. 마냥 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아름다움과 따듯함을 통해 다시 힘을 얻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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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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