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첫 ○○○ 그리고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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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회

몇 년 전 친구에게 요즘 우울한 것 같다고 말하니 친구는 내게 올해 첫 수박은 먹었느냐고 질문을 했다. 아직 못 먹었다고 답하니 친구는 그 즐거움을 느껴보면 기분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의 첫 수박 이외에도 친구는 올해의 첫 복숭아, 올해의 첫 콩국수, 올해의 첫 옥수수 등을 말해주었다. 줄줄 등장하는 제철 음식에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별 말은 아니지만 귀엽고 따듯한 대화처럼 느껴져서 자연스레 웃게 되었다. 먹을 것에 별 감흥이 없는 나는 친구가 맛있는 것을 먹으면 정말로 나아진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 친구의 말대로 먹을 것을 먹으며 기운을 내보자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올해의 첫 ○○○ 리스트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사실 여름을 좋아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떻게 여름을 싫어할 수가 있냐고 묻겠지만 내게 여름은 덥고 습하고 다른 계절보다 몸이 축 늘어지는 날들이 많다고 해야 할까? 여름엔 쉽게 무거워지고, 쉽게 무너지는 것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여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누군가 내게 여름과 잘 어울린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첫 시집을 여름에 내서 그런 것일까? 첫 시집의 제목에 산뜻함이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시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그냥 그런 느낌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덥고 습하기만 했던 여름이 갑자기 청량하고 산뜻한 여름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계절이 갑자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름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이라고 말하니까 불현듯 떠오른 것이 하나 있다. SNS에서 누군가가 아무 소리나 쓰고 마지막에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무언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쓴 글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련하고 추억에 잠긴 여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계절보다 유독 여름에 보고 느꼈던 것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붉게 핀 초여름의 장미를, 밤 산책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를 좋아하며, 비가 막 내릴 때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한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며, 제철 과일을 먹으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여름엔 방학이 있었으므로 대단한 계획을 세우지 않더라도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휴가를 비롯해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 여름을 기억하는 데에 한몫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연스레 나만의 아련하고 그리운 여름이 탄생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여름이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약간은 흐린 화면으로 기억 속에 재생되는 여름의 나날들이 있다. 올해의 첫 ○○○와 함께 말이다. 이 리스트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먹을 것에 큰 관심이 없으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보니 계절성이 뚜렷한 것 중 하나가 음식일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 복숭아, 포도, 참외, 자두 등의 제철 과일과 콩국수, 메밀 소바, 열무국수, 취나물, 옥수수, 감자 등의 음식이 있다.

친구는 내게 올해의 첫 다음에 오는 과일과 음식을 강조했지만, 나는 어쩐지 올해의 첫’, 그러니까 처음이 주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말과 여름이었다라는 밈을 조합해보면 올해의 첫 복숭아를 먹었다. 다섯 개 중 가장 붉은색을 띤 한 알을 골라 입 안으로 넣어보았다. 달고 맛있었다. 여름이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해의 첫 기억으로 조금은 긴 여름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 여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여름이라는 계절성과 함께 기억될 것은 많은 것 같다. 올해의 첫 여름 영화, 이번 여름을 기억하게 될 음악, 여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 혹은 책, 여름에 가장 아꼈던 옷과 나만의 공간, 그리고 여름에 썼던 편지 등. 올해의 첫 ○○○ 리스트와 함께 하니 여름이야말로 정말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올해의 첫 수박을 먹었다. 아쉽게도 맛이 있지는 않았다. (단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후숙을 더 시켜야 될 것 같았다. 다음에는 무엇을 먹을까? 올해의 첫 복숭아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시행할 예정이다. 처음의 설렘으로 여름을 재밌게 보낼 수 있기를, 무엇보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에 여름이었다라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올해의 첫 수박을 시작으로 나의 여름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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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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