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페스트』와 카프카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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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회

먼저 카뮈의 페스트를 살펴보죠. 이것은 너무도 널리 알려진 소설이라서 군말이 필요 없겠고, 단 한 가지 점만을 지적해두려고 합니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입니다. 오랑이라는 평범한 상업도시에 난데없이 번진 흑사병이 끔찍한 비극과 희생과 혼란을 자아내고는 마침내 물러갑니다. 이제 봉쇄되었던 도시가 활짝 열리고 사람들은 평화를 되찾습니다. 시청의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이별했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 부둥켜안고 거리에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술집은 대만원입니다.

그들 사이로 의사 리유는 아직도 완쾌하지 않은 병자를 보러 갑니다. 그는 그동안 역병疫病과의 투쟁의 중심에 서 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수없이 보아왔고 친구의 시체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때문에 쓰디쓴 눈물을 흘리면서도, 의사라는 직업의 수행을 통하여 죽음과의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이 되찾은 평화를 기뻐해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대하지 않았던 이 승리의 도래가 결코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의 구원을 추구해온 그의 용기만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냉철한 인식입니다. 좀 추상화抽象化시켜서 말해보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우리의 삶을 거부하려는 부조리와 부단히 마주친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그 절대적인 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구원의 보장도 없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일, 그것은 구원의 추구뿐이다. 그리고 이 추구의 과정에서 요행히 구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것을 절실히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구원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허상일 수도 있고, 덧없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에 의해서 패퇴敗退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다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구원을 찾는 추구의 궤적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서투른 변설보다도 이 소설 자체의 끝말이 여러분에게 한결 인상적일지도 모릅니다. “거리에서 올라오는 기쁨의 고함을 들으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는 것, 그러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의 세균은 결코 죽는 법도 사라지는 법도 없다는 것, 그것은 수십 년 동안이라도 세간이나 속옷에 숨어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에서 지하실에서 고리짝에서 수건에서 서류뭉치에서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을 안기고 인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흑사병이 쥐들을 깨워 행복한 도시로 보내고 그곳에서 죽게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뮈의 수기나 해설서를 보면 흑사병은 작가가 불과 몇 년 전에 체험한 전쟁(2차 세계대전)을 상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전쟁뿐이겠습니까? 흑사병이란 또한 독재체제나 식민지체제일 수도, 우리가 부단히 휘두르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는 가지각색의 폭력일 수도, 또 자연의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소설을 읽으면서 또 다른 것의 상징을 찾아볼 수도 있겠죠. 한데 그러한 상징적 의미는 카프카의 을 읽으면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페스트가 아닙니다. 카뮈의 소설에서 흑사병은 우리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인 힘을 나타내는 반면에, 카프카의 소설의 경우에는 성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 절대적 권위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에 해당하는 것이죠. 다만 에서는 주인공이 그 권위와의 만남을 위해,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행동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점에서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르고, 차라리 페스트와의 유사성이 있습니다. 한쪽은 대결이고 다른쪽은 만남을 위한 것이지만, 양자가 모두 죽음을 무릅쓴 구원의 추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 플롯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주인공 K가 접근할 수 없어 보이는 성에 접근하려는 한결같은 시도의 연속을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측량사로서의 일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어느 날 저녁 임지任地인 마을에 들어섭니다. 그곳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직업을 행사하면서 정착하려는 것이 그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마을을 다스리는 성의 당국자는 그의 일을 확인해주지 않고, 마을사람들도 그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정착의 권리를 얻기 위한 그의 악착스런 시도가 시작되지만 번번이 장애에 부딪칩니다. 성에 군림하고 있는 지배자와 관리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이성과 도덕의 규칙과는 다른 야릇한 법에 따라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K가 무엇보다도 괴로워하는 것은 그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책임자인 클람이라는 고관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K는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와의 접촉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시도는 흔한 말로 헛다리 짚기로 낙착되고 맙니다. 마침내 그는 클람이 마을의 호텔로 내려올 때 희롱의 상대로 삼는 프리다를 유혹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녀의 중개가 있으면 클람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K는 그녀에게 버림을 받고 이 희망 역시 좌절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호텔에서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한 관리를 만나는데, 지치고 지친 K는 면담 중에 졸아서 그의 이야기를 못 듣고 맙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툭 끊어집니다.

한데, 이 미완의 소설이 만일 완결되었다면 K의 운명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의 말에 의하면, 기진맥진한 K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마을사람들이 그의 곁에 모이고 성에서 거주 허가가 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감하는 것이 작가의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결말은 그가 결국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K가 바랐던 것은 파우스트와는 달리 삼라만상의 원리의 터득도 인류의 행복도 영원한 생명도 아니라, 소외된 한 인간이 그를 거부하는 세계에 어떻게든지 끼어들려는 매우 현실적인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카프카가 그의 계획대로 소설의 결말을 맺었다 해도 그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매우 아이러니컬한 것이 되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쓰여지지 않은 결말에 대해서까지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성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도 이 자리에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은 인간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 존재라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고, 개인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면서 지배하는 현대적 관료제도일 수도 있고, 특별히 카프카와 같은 유태인을 배척하는 정치적 세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해볼 문제이며,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희망을 잃지 않고 투쟁하던 한 인간이 결국은 겪고만 좌절입니다. 카뮈의 페스트는 추구의 끝에 일시적이나마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 남긴 것은 지울 수 없는 상흔傷痕뿐입니다. 그러나 끈질긴 구원의 추구가 남긴 그 상흔이야말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카프카를 너무나 인간주의적인 입장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한 것이 될까요? 그 판단도 여러분에게 맡기기로 하죠.

 

끝으로 한마디

 

이번에도 강의가 예정보다 길어져서 미안합니다. 또 희망으로 가득 찬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점에서는 우울한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청춘기란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유혹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자기가 받아들여온 관념이나 관습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아직 일정한 직업에 묶여 있지 않다는 특권을 마음껏 활용하여 지성과 상상의 터전을 넓혀나가고 그런 터전에서의 방황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내가 맥베스파우스트의 양극을 설정하고, 안팎의 인간조건과 관련시키면서 몇 가지 서로 다른 구원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제시한 것은 나 자신의 젊은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런 젊은이다운 기개氣槪마저 완전히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말했다시피 인간의 모든 문제는 구원의 문제로 낙착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서부터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간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추구해왔습니다. 한데 문학은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는 그런 추구의 집대성集大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과 사회와 세계를 스스로 살피기 시작한 여러분이 어찌 그런 문학적 표현들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극히 부분적이며 피상적인 이야기가, 여러분 자신이 앞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더욱 뜻 깊고 진정한 구원의 길을 찾아나가고, 또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남들의 희망과 절망을 성찰하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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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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