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의 사이

페이스북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블로그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링크 복사하기

52 회

여러분 중에도 이 연극을 구경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과연 이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매우 우울했겠죠. 차라리 흐느껴 울게 하는 내용이었다면 속이나 시원했을 텐데, 허망하게 웃어댔으니 그만큼 더 뒷맛이 나빴겠죠. 혹은 후에라도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는지요. 베케트의 비관주의는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인생을 생각하는 하나의 극이며, 현실적인 인생은 이러한 부정적인 극과 파우스트가 대표하는 긍정적인 극의 사이에 있으리라는 식으로 말이죠.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똑같습니다. 나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베케트의 작품들은 허울 좋은 기존 관념, 자기기만, 허위의식, 습관에 의한 마비 따위로부터 우리의 사고를 해방시키는 큰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정화적淨化的 반성이 반드시 인생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귀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파우스트적인 궁극적 구원 역시 인생에서 보장된 것이라고도 믿지 않습니다.

하기야 많은 경우에 구원이 베풀어지느냐 아니냐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나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희곡작가 라신의 비극들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구원을 바라는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린다는 인식은, 인생을 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반드시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희망과 절망의 피안에 몸을 두려는 체관諦觀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아예 생각하지 않겠다는 가장 비열한 도피주의입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등지는 행위, 가장 어두운 절망만도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이란 구원을 생각하고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까요.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의 언어와 거동에서 우리가 절망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바란다는 철없는 욕망, 그러나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욕망을 단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이 없다면 그들은 우리의 웃음도 반성도 자아낼 수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사물과 다름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인물들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기다림만이 있고 추구追求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고도라는 구원자를 찾아나서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방황이 될망정, 또 도중에 쓰러질망정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희망과 절망의 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도 대개 짐작했을 겁니다. 그것은 아무런 기약도 없는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 우리 앞길에 예비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안팎의 불행한 인간조건과 대처하려는 행위를 두고 한 말입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행동하는 사람들, 문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하는 사람들을 그린 두 대조적인 소설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

우리 현대문학 회원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내지는 타사의 메일을 차단하기 위해,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2월 19일]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