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과 절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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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회

현대의 상황과 관련해서 내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벌써 70여 년 전에 올더스 헉슬리가 발표한 멋있는 신세계(1932)입니다. 나는 이 반유토피아 소설을 대할 때마다 천재적 작가라는 것이 과연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헉슬리가 당시에 목격한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량생산의 기술, 의학과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 소련과 독일에서의 전체주의의 대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경향들을 함께 생각해보고 그 합력合力이 결국 어디로 귀착하느냐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한데 그가 상상해서 그린 세계처음에는 600년 후의 일로, 나중에는 한 세기 후의 일로 내다본 그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비단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현실에서도 헉슬리의 불길한 예견은 실현되고 있으며 그런 추세는 앞으로 가속화될 것만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읽었을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졌지만 세계 정부의 독재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 직능에 따라 서로 다른 유전자를 지니도록 조작되고 시종 인큐베이터 안에서 기획 생산되는 모든 인간, 책과 꽃을 짓밟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교육, ‘자유 평등 평화!’ 대신에 외치는 공동체 일체성 안정성!’이라는 구호,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는 이념하에서 말살되는 개성, 고독과 자아의식의 불식을 위해서 사용되는 강력한 진정제와 성적 유희와 운동경기와 합성음악, 그리고 개인을 사회적 대하大河의 물방울들처럼만들어주기를 기도하는 유사 종교의 교회`. 멋있는 신세계의 품 안에서 순치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멀리 보호구역에 갇혀 살고 있는 야만인결혼, 가족, 사랑, 예술, 신과 같은 옛날의 고리타분한 관습과 관념을 아직껏 간직하고 있는 야만인을 끌고 옵니다. 그러나 그 야만인은 신세계의 행복을 확인해주기는커녕, 자신의 구세계의 가치를 끝끝내 지키려 하고 그것과 대립하는 모든 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이렇듯 헉슬리의 전망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는 두 세대라는 엄청난 세월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나보다는 한결 멋있는 신세계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테니까요. 과학기술의 지배, 인간복제의 짙은 가능성, 유형무형의 조직의 힘, 생존경쟁을 위한 자기소외, 대중문화에 의한 탈혼奪魂작업, 획일적인 사고방식, 국가적 목표에 종속되는 개인`. 이런 현실화된 신세계의 삶의 여건을 뒤집어엎을 어떤 혁명적 수단이 있겠습니까? 헉슬리의 어두운 전망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숙명일까요? 혹은 여러분은 이미 어느 정도는 신세계에 익숙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개성과 자유를 말살하는 그 신세계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헉슬리나 나 자신과 같은 야만인의 생각이 틀린 것일까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두고두고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군요. 다만 나로서는 이제 신세계와 더불어 인간의 종언終焉이 오고 있다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간에, 지금 우리가 살핀 헉슬리의 상황제시는 내가 외적 인간조건이라고 이름붙인 차원의 것입니다. 한데 이에 가하여, 내적 인간조건과 관련된 더 본질적인 비관론이 예부터 이어져내려왔습니다. 현대문학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도 오늘날까지 자주 공연되어온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그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은 엉뚱한 등장인물들의 엉뚱한 언어와 행동을 대하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부랑인浮浪人이 고도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구해주기로 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혹시 신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기 어려워서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자살을 하려고도 해봅니다. 그런 익살스러운 말과 거동이 아무런 조리條理도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되기만 합니다. 그러는 중에 허세를 부리는 한 사람이 늙은 노예를 끌고 등장합니다. 노예는 엄청난 학대를 당하지만 묵묵히 굴종하는 것이 그의 제2의 천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후에 다시 한 번 나타나고 그때 주인은 장님이 되어 있지만 노예는 여전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함께 넘어지고 일어나고 하면서 길을 갑니다. 그러자 두 부랑아에게 한 소년이 거듭 나타나서 고도는 오늘 저녁이 아니라 내일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해가 지고 달이 뜨곤 합니다. 그들은 다시 목을 매려고 하나 끈이 끊어집니다. 내일 또 목을 매보자고 하지만, 혹시 기적처럼 고도가 오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만 가자고 하면서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소극笑劇입니다. 그러나 관객은 웃다가도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두 부랑인과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막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두 부랑인은 아마도 처음과 똑같은 무의미한 거동을 한없이 되풀이하리라는 것이 극장을 나설 때의 관객의 상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산다는 것, 그것은 그 두 인물처럼 결코 오지 않는 그 무슨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기다림의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먹는 데 신경을 쓰고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고 시름에 젖어보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어느 날 난데없이 죽음이 올 때까지 여전히 무익한 기다림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데 이런 생각을 하면 미치게 되니까, 럭키Lucky라는 아이러니컬한 이름의 그 노예처럼 굴종을 달게 받아들이면서 무의미라는 이 삶의 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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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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