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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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회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다소간을 불문하고 시대적·사회적 상황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원을 찾으려는 이러한 태도가 아니라, 역으로 그 상황과의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삶과 죽음의 근본문제와 구원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문학적 표현이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는 그런 표현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상황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도리어 일상성을 초월하는 초시대적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어떤 불변의 가치에 입각해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서 나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의 한 장면을 들고 싶고, 후자의 예로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려 합니다.

인간조건(1933)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1927년의 상하이上海 혁명입니다. 외국세력과 봉건세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그 도시의 해방을 위해서 공산당의 주동으로 폭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정부군을 격퇴하고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군대를 혁명군으로서 맞아들이나, 도리어 그 군대에 의해서 무참하게 진압되고 맙니다. 배신을 당하고 화를 자초한 꼴이 된 것이죠. 그러나 소설은 이 과정을 그리고는 있지만, 양자 간의 충돌의 정치적 의미를 부각시키거나, 일반적인 참여문학과 같이 그 어느 한쪽의 편을 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느냐는 것을 추구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은 극한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도리어 죽음을 넘어서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최후입니다.

그 장면은 소설의 뒷부분에 나옵니다. 공산당의 지령으로 봉기했던 투사들은 줄줄이 잡혀서 곧 기관차의 화통에 쓰레기처럼 생화장을 당할 찰나에 처해 있습니다. 소련 공산당에서 파견되었던 카토브 역시 그의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곧 치욕적인 죽음을 겪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카토브 자신은 자기가 지녀온 청산가리로 자살을 하여 그 치욕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둘로 쪼개서 두 동지에게 건네줍니다. 감시병의 그늘 속에 누워서, 생명보다도 귀중한 청산가리를 건네주고 건네받을 때의 두 손의 뜨거운 움켜쥠, 그것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카토브가 지른 오오, 살았다!”, 고함소리보다도 우렁찬 속삭임, 두 동지의 죽음을 알리는 경련이 그의 손을 통해서 전해왔을 때의 부러움과 고독, “너는 왜 청산가리를 먹지 않았느냐는 감시병의 물음에 두 사람 몫밖에 없었오라고 대답했을 때의 그의 깊디깊은 기쁨`. 여러분은 나의 빈약한 몇 마디의 설명에 의지하지 말고 이 감격적인 장면을 꼭 읽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당면했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던 이 우애友愛야말로, 화통으로 끌려간 카토브의 영혼을 구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도 많은 연구와 해석의 대상이 되어온 이 시집에 대해서 내가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시적 화자인 , 죽음의 순간에 역설적인 구원을 얻는 인간조건의 카토브와는 반대로, 처음부터 이미 깨달은 자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카토브의 경우에는 생명을 내건 구원의 궤적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님의 침묵의 경우에는 그런 고행은 시적 언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끝났고, 이제 는 님으로 표상된 타자他者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밝히려 하는 계도적啓導的 존재입니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군말에 이렇게 분명히 표현되어 있죠.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러니까 바로 이 어린 양이 곧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님이요, 내 곁을 떠났지만 내가 사랑의 노래로 다시 불러오려는 님입니다. 그리고 이 이 여래장如來藏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조국을 빼앗긴 중생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의 경지를 터득한 선사禪師 한용운이 라는 시적 화자를 빌려 식민지 백성으로서 시달리고 실의에 빠진 동포를 구하기 위한 일종의 참여로 나선 것입니다. 그로서는 그것은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왜냐하면 선학을 종료한 후에는 반드시 출세하여 입니입수入泥入水,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서 님의 침묵이 초월적 가치에 입각해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문학의 한 본보기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것은 시인이 터득한 진리가 곧 현실적으로 시대고를 겪는 인간의 구원의 원리로 작용했다는 매우 귀중한 결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용운이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타고르를 넘어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인 자신의 이런 다부진 소리를 들어보세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셔요.”(타고르의 시를 읽고)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섬짓한 저항의 외침도 아울러 들어보세요. “많지 않은 나의 피를 더운 눈물에 심어서 피에 목마른 그들의 칼에 뿌리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울음 섞어서 말하겠습니다.”(참말인가요)

사실을 말하자면, “님은 갔습니다라는 영탄으로부터 님을 맞기 위해서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라고 서둘러 나서는 끝 장면까지에 걸친 80여 편의 시가 모두 걸작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가령 당신을 보았습니다」 「복종」 「만족과 같은 시는 평범합니다. 또한 처음과 마지막의 시 사이에 어떤 긴밀한 연맥이 변증법적으로 혹은 점증적漸增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터득한 자가 중생에게 말하는 이런 종류의 시나 소설은 설교문학으로 전락하는 일이 많은데, 님의 침묵은 그 위험에서 대체로 벗어나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때로는 시인 자신이 깨닫기 이전에 겪었던 번뇌를 상기하고, 때로는 육감적이기조차 한 이미지에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또 더 자주 수도修道의 길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길 사이의 아날로지를 설정하는 따위의 수법으로, 절대적 진리와 역사적 구원을 결부시킨 이 시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한용운은 시집의 끝에 붙인 독자에게에서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서 자기의 시가 어서 마른 국화처럼 향기를 잃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매우 역설적인 소원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님의 침묵은 과연 시효상실이 된 문학사적 유물일까요? 혹은 오늘날에도 역시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원리를 베푸는 살아 있는 목소리일까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곁을 떠나간 님은 과연 누구이며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요? 나는 종교계의 많은 선각자들이 그런 문제를 떠안고 님의 침묵에서의 와 같은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오늘날 마주치고 있는 문제는 한용운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렵고 괴롭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문학적 언어들을 한두 가지 살펴보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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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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