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상황과 문학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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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회

나는 여기에서 무정이라는 황당무계한 소설이 맥베스파우스트에 필적하는 걸작이라고 우기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걸작이건 졸작이건 간에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불가피하게 두 가지 인간조건의 얽힘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인간조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그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고 설익기도 한 질문입니다. 다만 문학사를 보면 많은 작품들이 양자의 얽힘을 다 같이 인식하면서도 그중심重心은 어느 한쪽에 편향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맥베스파우스트는 물론 시대적 산물이기는 하지만 내적 인간조건과의 관련에서 구원의 가능성 여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는 욕망에 끌리는 인간의 끔찍한 자기파멸을, 후자는 가능성의 한계까지의 모험의 궤적과 종극적 구원의 존재를 말해줍니다.

한데 한국문학의 경우를 보면, 삶과 죽음의 보편적 양상에 대한 관심보다도 시대적 여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어온 것 같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시도 소설도 삶의 불행과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의 문제를 외적 조건과 관련시켜 살피는 일이 두드러진 전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그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신이 생활과 사상에 속속들이 들어앉은 일이 없었고, 따라서 이른바 신의 죽음이 삶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는 엄청난 체험을 겪은 일도 없습니다. 이런 사정은 불교와 기독교의 양자에 걸쳐서 엄청난 수의 신자가 있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적 인간조건의 근본문제를 신의 존재와 결부시켜 살핀 작품은 매우 보기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사회적·정치적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어온 민족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근대사만 생각해보아도 가난 속에서 겪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굴욕, 해방 후의 혼란, 민족상쟁의 참극, 군부독재와 그것에 대한 저항, 근대화가 가져온 계층 간, 세대 간의 갈등, 아직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 그런 상황하에서 작가나 시인이 어떻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직설적이건 상징적이건 간에, 희망적이건 절망적이건 간에, 또 투쟁적이건 서정적이건 간에, 최남선으로부터 정지용을 거쳐 김지하에 이르는 한국시의 전통을 이러한 민족적 고난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소설은 민족적 고난의 성찰과 극복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바로 이 점에 한국소설의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상황의 의식에서 출발한 문학, 그리고 그 상황과의 관련에서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는 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문학적 표현은 물론, 그 후로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나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은 사회적·정치적 억압의 고발과 그것과의 투쟁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야말로 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또한 우리 한국인과 같이 제국주의 침략을 겪었던 모든 민족에게 공통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령 네그리튀드의 대표적 시인 생고르가 유럽 지상주의에 항거하여 읊은 다부진 종족적 자존自尊의 시구를 읽어보십시오.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바람결 주름살도 짓지 않는 기름, 역사의 허리에, 말리 왕자들의 허리에 바른 고요한 기름아./(`)/그대 머리털의 그늘 속에서, 나의 고뇌는 이제 솟아날 그대 두 눈의 태양빛을 받아 환하게 밝아오네.”

 

사회적 상황을 다루는 문학의 한계

 

그러나 한발 물러나서 생각해봅시다. 아주 쉬운 질문부터 한 가지 던져보죠. 만일 사회적, 정치적 구원을 지향하는 그런 선의의 주장이 마땅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어떤 정당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그 선전삐라와 같은 한심한 작품을 양산하는 일은 없을까요? 사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소련시대의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도 1930년 내외나 해방 직후에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이름으로 산출된 많은 소설이나 시가 그렇습니다. 가령 이기영의 고향이나 임화의 깃발을 내리자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매우 소박한 정의감이 가져온 도식적이며 선동적인 언사에 불과합니다.

그뿐 아니라 시대적 조건과 문학과의 관련에서는 다른 문제들도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만을 간단히 살펴보죠. 첫째로 문학이 시대적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겨냥한다면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그것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들 한국인의 문학적 전통에서는 시대고時代苦를 밝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글쓰기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척도가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한때 사르트르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문학을 통한 정치적 참여가 굶주린 어린애 하나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술회하면서 문학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발언이 마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이 시대고라는 인간조건과 맞서서 사회적·정치적 구원을 추구한다 해도 그것은 그런 직접적 효과를 위한 것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직접적 효과를 바란다면야 행동의 제일선으로 나설 것이지 무엇 때문에 문학적인 글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문학이 겨냥하는 시대적 구원이란 독자로 하여금 시대의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게 하고 더 깊은 성찰과 진정한 신념으로 이르게 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며, 당장에 행동으로 뛰어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가와 시인의 책임은 그만큼 더욱 무겁습니다. 그는 시대의 상황에 대한 다각적이며 냉철한 고찰을 그의 창작의 밑에 깔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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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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