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인간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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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인류가 생겨난 그 옛날부터 한결같이 지속되어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나서 얼마 동안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우리의 팔자가 바로 그것이죠. 불교는 그 과정을 미망과 번뇌로 보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을 진정한 삶의 길이라고 타이릅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신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데,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런 것을 완전히 깨닫고 이미 해탈했거나, 이 지상에서 벌써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행복한 초월자超越者들에게 문학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대한 이의제기인데, 도통한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그런 이의제기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종교적 찬양이며 기껏해야 속인을 위한 설교입니다. 하기야 그런 찬양이나 설교에 멋있고 맛있는 표현을 섞어넣어 문학적 냄새를 풍길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문학의 본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문학은 우리들 안에 깃들어 있는 생로병사의 인간조건(이제부터 그것을 내적內的 인간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죠)에서 풀려나오지 못하면서도 구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의제기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구원의 추구인데, 거기에는 물론 종교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긴 합니다. 가령 깬 자가 보기에는 잠들어 있고, 잠든 자가 보기에는 깨어 있는 수도승과 같은 사람은 문학적 형상화에 알맞은 존재이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그런 수도의 도상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서양문학을 보면 신을 찾아가는 고행, 신을 잃은 자들의 방황, 신 대신에 어떤 절대자를 발견하거나 스스로 절대자가 되려는 모험 따위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가 잠시 살펴본 파우스트는 바로 그런 현상의 집대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제가 종교적이건 아니건, 또 종국적으로 구원을 발견하건 절망에 빠지건 간에, 문학작품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인간조건을 미처 초월하지 못한 자들이 보여주는 과정, 때로는 성공적이지만 때로는 비극적이며 아이러니컬한 과정 그 자체이며 결론이 아닙니다. 비록 결론에 무게가 실린다 해도 그 무게를 이루는 것은 과정입니다. 인생의 무의미에 절망하는 맥베스의 목소리도 파우스트의 영혼을 맞는 구원의 찬가도 그들이 그 이전에 겪은 체험들을 떠나서는 한낱 몇 마디의 추상적 언사言辭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조건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내적 조건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자는 또 하나의 피치 못할 조건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可變的인 상황, 외적外的 조건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상황입니다. 나는 일제시대에 조선사람으로서 봉건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그것은 내가 바랐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로 말하자면, 생활의 방편과 수준은 많이 좋아졌으나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한 분단국가를 삶의 터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것, 가령 역사, 전통, 이데올로기, 정치사회 제도, 천재지변을 포함한 자연환경, 유형무형의 문화 따위의 총체가 우리의 외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내적 조건과 얽혀 있습니다.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마땅한 구원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시공을 떠난 순수한 경지에서가 아닙니다. 맥베스의 비극은 왕권국가라는 정치적 제도의 배경하에서 일어난 일이며, 파우스트의 경우처럼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영혼을 구한다는 생각은 특히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시대에 유행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변의 내적 인간조건의 문제는 항상 가변적인 외적 인간조건하에서 의식되고 해결의 가능성이 모색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로, 이광수의 무정을 보더라도 같은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박영채가 삶과 사랑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무슨 초시대적超時代的인 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분제도와 미혼여성의 정조를 불가침의 원리로 삼았던 당시의 이데올로기 에서 비롯된 것이며, 반대로 그녀가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는 것도 김병욱이라는 신여성新女性의 사상의 감화를 받은 덕분입니다. 또 주인공 이형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한국사람 전체의 삶을 구하는 길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 일만 이루어지면 낙원이 오는 듯이 들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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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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