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와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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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회

그러니 이 터무니없이 다양한 구원의 시도들을 두루 다루려는 터무니없는 짓은 아예 생각하지 맙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역사와 정신의 전체상을 밝히겠다는 욕심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양극단을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절망의 소리이며, 또 하나는 구원의 실현을 알리는 기쁜 소리입니다. 하기야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싱거운 말입니다. 구원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의 노력 여하를 불문하고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무슨 근거에서 구원의 유무를 말하고, 무엇을 구원의 원리나 계기로 삼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양상들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그 양상을 두루 살필 수는 없는 이상, 나는 우선 그 양극단을 보여주는 두 작품을 예로 든 다음, 몇 가지 경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구원의 문제가 문학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방대한 것인지 그 편린片鱗이라도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러분도 읽었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회상해봅시다. 아마도 이 희곡만큼 암울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는 달리 찾아보기 힘들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서두에서 맥베스가 세 마녀의 유혹에 빠져서 왕을 시해하는 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서양문학에서 자주 나오는 이른바 악마의 속삭임의 모티프가 여기에서도 다시 등장한 셈인데, 우리는 그것을 한 상징으로 읽을 때 더 뜻 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마녀의 유혹이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속에 깃들어 있는 욕심이란 이름의 악의 씨가 싹튼 것을 의미하며, 맥베스는 모든 도덕적 계율에도 불구하고 마치 숙명인 양 그 심연으로 끌려가는 인간, “악으로 시작된 것을 악으로 완결하려는신화적 인간입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 악이 세상에 미치는 해독이 아닙니다. 또 이 희곡은 맥베스의 패망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 초점이 권선징악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읽어야 할 것은 그 자신이 악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중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왕의 시해를 실행하기 이전부터 그가 상상했던 피의 공포는 그 실행과 더불어 배가倍加되고 그의 잠을 빼앗아갑니다.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다른 살인을 가져오고, 이리하여 날이 갈수록 황폐해가는 그의 영혼에는 지옥과 같은 어둠만이 짙어갑니다. “차라리 삼라만상이 산산조각이 나고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움 속에서 조석을 먹고, 밤마다 사람을 시달리게 하는 이 악몽의 괴로움을 받고 싶지는 않다”(여석기 역)는 절실한 구원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자승자박한 이 희생자에게는 어떠한 출구도 없습니다. 의지나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이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는 파토스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라면 바로 이러한 경우가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라고 말했을 법합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맥베스에게 신 앞에서 속죄하라고 말했다면 아마도 다시 밀어닥치는 피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신마저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죠. 아무튼 간에 두려움의 노예가 된 그에게 인생의 뜻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이미 왕을 시해한 직후에도, “차라리 한 시간 전에 죽었으면 축복된 삶을 산 것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이 순간부터는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고 영탄한 맥베스는 마침내 악의 선동자煽動者요 동반자였던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망의 시구를 남깁니다.

인생이란 걸어서 다니는 그림자일 뿐, 잠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대 위에서 뽐내고 으스대지만 그때가 지나면 영영 사라져버리는 가련한 광대. 그것은 백치가 지껄여대는 이야기, 떠들썩한 소리만 왁자지껄 높았지 필경 아무런 뜻도 없는 짓거리.”(55)

셰익스피어는 이렇듯 악이 우리들 속에 잠자고 있는 일종의 휴화산이며 그것이 일단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숙명처럼 우리를 몰고 가서 스스로 그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직선적直線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데 이러한 절대적 절망의 대극對極에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습니다. 맥베스의 갑갑하고 끔찍한 의식의 감옥을 숨막힐 듯 체험한 독자가 파우스트를 대하면 갑자기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한복판에 나선 것과 같이 느낄 것입니다. 하기야 이 희곡은 우울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긴 합니다. 파우스트는 어두운 서재에서, 어떠한 지식도 천지의 비밀을 밝힐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부활절을 축하하는 노래가 들려와서 그는 다시 생명의 힘을 되찾습니다. 이제 그는 정열적인 삶을 누리려고 합니다. 한데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파우스트는 자기의 영혼을 판다는 조건하에 이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여 시공時空을 초월한 체험을 이어나갑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으려는 욕심이 자아내는 희열과 방황과 죄악과 반항의 연속입니다.

그중에 널리 알려진 그레트헨(마르가레테)과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은 파우스트는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되고 파멸의 운명을 함께해도 좋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으로 얼룩진 사랑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방해가 되는 그레트헨의 어머니와 오빠는 살해되고, 그녀 자신도 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녀를 탈출시키려는 파우스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죽음을 맞으면서 신의 도움을 간청한 그레트헨의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을 뿐입니다. 이것이 이 희곡 제1부의 끝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파우스트는 끝끝내 그레트헨의 영혼이나마 찾아다녔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그녀를 배반하고 맙니다. 2부의 시작에서 알프스에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나타난 파우스트는 다시 영혼의 활력을 찾고,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 새로운 환상적인 체험으로 나섭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에는 헤매는 존재이다라는 말처럼 천지간天地間의 일체의 것을 찾아보고 향유享有하기 위한 대장정을 계속하려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여러 시련과 체험을 겪은 끝에 결국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 없는 향락이 아니라 계속적인 창조로의 길로 나가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해안지대를 개척함으로써 인류의 복된 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죽습니다. 그때 메피스토펠레스는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거두어가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그의 방황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자아에서 벗어난 인류애의 덕분으로, 그리고 특히 그가 사랑했지만 배반했던 그레트헨의 영혼에 깃들어 있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의 도움을 받아, 천사들의 축복 속에 승천했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해서 내가 이 이상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 될 것입니다. 또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 방대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작품을 맥베스의 대극에 위치시키고, 종국적 구원이 존재한다는 주장의 한 본보기로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맥베스적인 나락으로부터 파우스트적인 구원의 길로 걸어나온 것일까요? 비록 그들이 보여준 바와 같은 그렇게 엄청난 체험이 아니더라도, 흔히 말하듯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의 전진前進이 이루어져 나왔을까요? 아직 많은 인생의 경험을 쌓지는 못한 여러분이지만, 이런 소리를 들으면 당장에 내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소? 대답이야 뻔하지 않소?” 하고 핀잔을 줄 것입니다.

사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삶도 인류의 역사도 그런 직선적인 전진을 보여온 것이 결코 아니라, 그 양극兩極 사이에서 흔들려온 것이 너무나 뻔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욱 복잡한 일로, 구원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현실이나 태도가 진실한 구원인지 사람과 시대에 따라 그 판단이 엇갈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끌려서, 가령 구약성서의 욥기를 들먹이며 고난은 반드시 구원으로의 길을 튼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희망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그런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선의에는 지성이 결핍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늘 품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실의와 불행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좀더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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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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