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없이 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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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한데 이렇게 매우 초보적인 정의를 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니 또 미리 말해둘 것이 두 가지가 있는 것 같군요. 첫째는 이 강의에서는 나는 나 자신의 입장을 되도록 밝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나름대로 구원에 관한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에 따라서 여러 작품들의 가치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들은 걸작이라고 칭찬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신통치 않아 보이는 것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의 만남의 목적이 나 자신의 주관적 가치판단을 피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삶의 영위營爲에 비추어서 밝혀보려는 데 있는 이상, 그 목적에 합당하게 이야기를 되도록 객관적으로 전개시키려 합니다. 하기야 이런 객관성이 완전히 보장되기 어렵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공평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들, 나의 개인적 호불호好不好가 은연중에 배어나올 테니까요. 그야 별수 없는 노릇이죠. “당신이 보는 것을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겠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의식적으로 구원에 관한 나의 생각은 이러이러하니 여러분도 그것을 따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그런 말을 한다면 나 자신이 나의 강의의 취지를 배반하는 꼴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문학강의 전체를 통해서 여러분이 어느 한 생각이나 신념에 묶이지 않기를 바라왔기 때문입니다.

사설이 너무 길어졌나요? 미안하지만 잠깐만 참아주세요.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것은 구원이라는 주제가 엄청나게 커서, 내 이야기는 극히 부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앞서 문학과 놀이의 관계를 살필 때도 문학에 나타난 놀이의 양상에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는데, 구원의 주제는 놀이의 주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나 죽음의 슬픔을 노래하는 서정시로부터 사회적 부정을 고발하거나 어떤 초월적 존재를 찾으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또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모더니즘할 것 없이, 모든 문학적 표현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입니다. 아니, 인생에 관한 모든 발언과 행위가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절망적인 말이나 행동이 절망적인 이유는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밑에 깔려 있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조차 구원의 욕구의 소산입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그 욕구를 청산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자는 또 다른 구원의 욕구가 없다면 아무도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도통한 성인군자나 완전히 해탈한 부처님이 이미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은 제자리에 머무를 줄을 모르는 불평분자들입니다. 한데 문학이란 도통이나 해탈의 경지 자체를 찬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 언어의 몫입니다. 문학의 세계는 도리어 그 불평분자들이 절대적인 안주安住의 자리가 아닐망정 적어도 임시적으로나마 더 편한 자리를 찾으려고 벌이는 천태만상의 시도, 가지가지의 성공과 좌절로 엮인 그런 시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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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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