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놀이로서의 책 읽기―다시 「서편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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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회

나는 방금 긴장을 풀지 않고 지적 놀이를 끝까지 이어가게 만든다는 말을 했지만, 이것은 추리소설만이 아니라 모든 훌륭한 문학작품의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가 없죠. 가령 권선징악의 소설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런 소설은 앞으로 어떻게 되어나갈까?’하는 독자의 질문을, 즉 지적 놀이를 유지시키지 못하고, 몇 장만 넘겨도 벌써 결말을 빤히 들어내고 맙니다. 예컨대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가 판소리로 승화되었으니 천만다행이지, 만일 여러분이 그 이야기만을 그대로 읽는다면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여러분의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나는 모든 문학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추리소설을 모범으로 삼으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의 문제를 다루는 문학작품들이 어떻게 순수한 추리의 놀이일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삶과 세계를 밝혀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독자의 의문이 부단히 유발되도록 텍스트가 꾸며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독자가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죠. 한 예로, 우리가 지난번에 잠깐 살펴보았던 서편제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죠.

우리는 앞서 이 소설이 가장 일반적인 리얼리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독자가 알고 있는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주목하지 못한 더 깊은 현실 속으로 독자를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라는 뜻의 말을 했었죠. 한데 서편제는 이 유도의 작업을 곧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이중으로 이루어집니다. 우선 주인공인 사내는 마치 탐정처럼 자신의 예감을 따라 소릿재 주막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독자의 의문과 추리의 놀이가 시작될 터입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 주막을 찾는 것일까? 그의 예감이란 무엇일까? 옳게 찾았을까?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예감이 아직도 흡족하게 채워지질 못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니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하는 식으로 독자는 스스로 물어보고 또 대답을 상상하면서 텍스트를 읽어나갑니다. 이런 지적 놀이의 계속, 다시 말하여, 의문과 해답, 오해와 상상의 변주變奏의 연속이 이 소설의 재미를 이룹니다. 가령 한 장면만 예를 들어보죠. 독자인 우리는 비교적 빠른 단계에서 주인공이 찾는 것이 소리를 하는 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났을 때, 누이가 비록 장님이긴 하지만 오누이임을 서로 인지하고 확인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어긋납니다. 그래서 또 의문이 싹틉니다. “두 사람은 하룻밤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들의 관계를 알았을 텐데, 그것을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라비는 왜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앞으로 있을 일이 두려워서? 그렇다면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독자의 의문을 유발하고, 그의 해답을 뒤집고 또 다른 상상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작가 이청준의 재주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재주에 비해서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편제가 독자에게 자아내는 추리의 놀이는 순수한 추리소설의 경우와는 달리, 말하자면 실존적 추리의 놀이입니다. 이것은 모든 훌륭한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독자는 그런 추리를 꾸준히 이어나감으로써 주인공과 함께 삶과 세상의 새로운 진실을 밝혀나가고, 또 도덕적 자아의 문제를 성찰해나갑니다.

그러나 그 결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서편제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일종의 해피엔드로 끝나기는 합니다. 주인공은 제 뼈를 깎는 듯한 방랑과 고행을 거듭한 끝에 용서라는 말의 깊은 뜻을 발견하지만, 다른 많은 작품들은 체념으로, 절망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일까요?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고 반대로 구원의 길이 있다면 서편제가 보여준 용서이외로 문학이 보여주는 다른 길들은 무엇일까요? 다음에는 우리의 생사와 직결되는 그런 문제를 주제로 삼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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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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