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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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여러분이 잘 아는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이방인은 이른바 부조리가 존재의 진실한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들 흔히 말합니다. 물론 이 소설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부조리의 제시가 그중요한 일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작가 자신은 소설의 어디에서도 이것은 부조리의 소설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은 소설의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그 언어가 이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는 원래 조리條理나 연맥이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도록 짜여져 있는 것이죠. 특히 소설의 제1부를 보면, 마치 토막을 친 듯한 짧은 문장들이 연이어 나옵니다. 가령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양로원에 가서 장례식을 기다리는 장면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는 뜰의 플라타너스 밑에서 기다렸다. 나는 산뜻한 대지의 냄새를 들이마셨고, 그리고 이제는 졸리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의 동료들을 생각했다. 이 시간에 그들은 출근하려고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언제나 지금의 시간이 제일 어려운 시간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 종소리가 나서 생각이 흩어졌다.”

이 몇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리가 순수묘사라고 부를 만한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돌아간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감회도 없습니다. 다른 소설 같으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갔으니 그동안 내버리다시피 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 따위로 이 기다림의 장면을 채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딴짓만 하고 딴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가 불효자식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렇게 썼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의식이 조리 있고 줄곧 한곳으로 쏠리는 듯이(이 경우 같으면 돌아간 어머니만을 생각하는 듯이) 묘사하는 것이 진실에 어긋나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그 문장들 사이에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 따위가 없습니다. 속되게 말하자면 문장들이 따로따로 놀고 있습니다. 굳이 인과관계를 명시하려면 산뜻한 대지의 냄새를 들이마셨기 때문에 이제는 졸리지 않았다라고 쓰면 될 텐데, 카뮈는 그 사이에 연관이 없듯이 두 구절을 그냥 그리고라는 등위等位 접속사로 연결해놓고 있을 따름입니다. 흡사 바다 위로 갈매기가 날아간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바다가 있다, 그리고 갈매기가 날아간다라고 말함으로써, 바다와 갈매기의 연관을 끊어버리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뫼르소가 그 시간에 다른 생각이 아니라 회사동료의 생각을 한 이유도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조리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존재와 의식에 질서도 연관도 없고, 그것들은 두서없이 연속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한데 우리는 그런 상태를 오직 문장구조, 즉 기표의 유희를 떠나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카뮈가 이 장면을 이유나 결과를 나타내는 긴 문장들로 처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런 기표가 부조리라는 주제를 죽이고 말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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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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