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유희의 두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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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회

한데, 일상적 언어의 피안에서 시인이 전개하는 언어유희에는 두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엄밀한 규칙을 지키거나 스스로 만들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규칙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 두드러진 예를 내가 공부해온 프랑스문학에서 들자면, 한쪽 끝에는 우리가 방금 언급한 발레리가 있고, 다른쪽 끝에는 초현실주의의 시인들이 있습니다.

발레리의 대표작의 하나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해변의 묘지인데, 이 시의 성립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쓸 때 발레리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주제가 먼저 정해지고 그것에 합당한 형식이 선택되는 법이지만, 그 관계가 뒤집힌 곡절을 발레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해변의 묘지는 내 머릿속에서 어떤 리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4음절과 6음절의 음보로 나뉘는 10음절의 시구로 된 리듬이었다. 나는 이 형식에 담을 어떠한 시상詩想도 아직 가진 바 없었다. 그런데 차츰차츰 떠도는 말들이 그 리듬 속에서 자리잡고 서서히 주제를 이루어나갔으며, 그리하여 작업이(매우 긴 작업이) 뒤따랐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12음절 시구 대신에 10음절의 시구를 써보겠다는 희한하고도 고단한 언어유희가 삶과 죽음에 관한 그 깊은 명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이와 정반대의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두서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을 그대로 적어나가자고 하여 이른바 자동기술법이라는 것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은 혹시 들어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이성과 광기, 행동과 꿈, 과거와 미래, 육체와 정신 등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억압되어왔던 우리의 의식을 해방시키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죠. 그러니까 일체의 운율법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죠. 나는 여기에서 그런 규칙 파괴의 한 예로서 그들이 시도한 일종의 변형된 자동기술법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몇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각자가 어떤 단어를 적어 그것으로 한 문장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들 중의 첫째 사람은 명사를, 둘째 사람은 형용사를, 그 다음 사람은 동사를, 하는 식으로 적어나갔습니다. 문자 그대로 언어유희를 한 것이죠. 그랬더니 결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체가 새로 담근 술을 마신다.” 만일 한 사람이 지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을 이 기상천외의 이미지는 한낱 난센스에 불과할까요, 혹은 일상성에서 완전히 해방된 언어유희가 가져오는 희한한 환상이며 기쁨일까요?

 

 

한없이 다양한 시적 언어

 

그 판단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가 발레리와 초현실주의자의 양극단을 든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죠. 내 생각에는 모든 시적 언어는 그 양극단 사이에서 한없이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엄격한 규칙을 수용하면서 그 안으로 언어를 농축시키느냐, 혹은 규칙을 파괴하면서 언어의 해방을 시도하느냐, 또 혹은 많은 한국시가 그렇듯이 그 중간 형태를 취하느냐는 것은 시인들 각자가 그의 시상詩想과의 관련에서 선택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규칙을 따르건 혹은 파괴하건 간에 그 동기가 반드시 발레리나 초현실주의자와 같아야 한다는 법은 물론 없습니다. 가령 이상의 오감도烏瞰圖에 포함된 여러 시들은 한국시의 관례를 깬 것이지만, 그것들이 보여주는 언어유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시 자체를 거부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 조를 까마귀 오로 바꾸어놓고 그것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 벌써 그 징조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형시가 담을 수 있는 주제도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무한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령 김소월의 서정과 발레리의 지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과 시상이 어떻든 간에 시라는 이름에 마땅한 시는 그 언어유희를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매만지고 뒤집고 또 뒤틀기도 하면서 그 힘과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삶과 세계를 새롭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한데 그런 언어활동은 다만 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소설과 같이 산문으로 된 작품에서도 그 작업은 덜 눈에 띄긴 하지만 여전히 이어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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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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