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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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회

지난번 강의에서는 우리는 문학이 참의 탐구 및 제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참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예로부터 복잡하고 또 그 대답에는 아마도 영원히 합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일 테니까요. 이에 반해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보려는 놀이와 문학과의 관련은 한결 쉬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우선, 우리말에는 놀다라는 동사에 여러 가지 뜻이 있어, 심지어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린다는 반갑지 않은 상태도 가리키지만, 그 말을 재미있는 일을 하여 즐긴다는 의미로 한정시켜 생각해본다면 그 활동에 무슨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업生業이나 의무를 망각할 정도로 지나치게 논다거나, 자신의 심신心身을 해치고 남들의 빈축을 살 만한 못된 장난을 일삼지 않는다면 놀이를 가지고 시비할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또한 문학과의 관련을 보자면, 놀이나 노는 사람을 주제로 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놀이가 보편적인 인간의 활동인 이상 다소간을 불문하고 그것에 언급한 작품은 무수히 있을 터입니다. 마땅하게만 논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며 또 그런 놀이의 묘사를 작품에서 만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할까요? 당장에 누가 여러분에게 놀이의 재미에 무슨 뜻이 있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심심풀이, 카타르시스, 스트레스 해소, 신바람 등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죠. 오늘날의 긴장된 사회생활로 보아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스트레스 해소라는 대답이 많겠지만 그 모든 대답에 일리가 있습니다. 가령, 심심하니까 카드놀이를 하고, 어떤 강박관념에서 풀려나 상쾌한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수영이나 스키를 하고, 과중한 노동으로 쌓인 피로감을 일시에 날려보내려고 제트코스터를 타고, 또 신바람을 찾아서 급류 타기를 할 겁니다. 그러나 놀이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놀이의 욕구에 끌리며 그 재미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좀더 근본적인 반성을 해볼 수는 없을까요? 다시 말해서, 단순히 심심풀이나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차원을 넘어선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놀이에 부여해보자는 것이죠. 나는 그 절차로서 세 가지 경우를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우리의 귀에 너무나 익은 민요 한토막을 상기해봅시다. “노세…… 인생은 일장춘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는 그 가락 말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로 그것은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중의 한풀이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라는 말은 젊어서도 놀지 못하는 괴롭고 가난한 삶에 대한 한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필경 무거운 짐을 지고 가거나 허리 굽혀 논밭일을 하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민요에는 민중의 생활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주장의 실마리가 담겨 있다고도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사실 놀이의 재미를 가장 짜릿하게 맛볼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놀이는 인생론과 결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장춘몽에 불과한 덧없는 인생을 가장 잘사는 길은 고생이 아니라 쾌락의 추구라는 생각은 동서고금에 흔한 것이며, 놀이는 이러한 쾌락주의와 연관되어서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허무적인 인생관에 바탕을 둔 이 쾌락주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덧없는 인생일망정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놀고만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아무런 제한도 없는 계속적인 놀이는 놀이가 가져오는 재미 그 자체를 앗아갑니다. 말하자면 놀이의 자살로 낙착되는 것이죠. 모든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절실하고 귀중하다는 역설은 놀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쾌락주의를 떠나서 또 하나의 구절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그것은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라는 영국의 속담입니다. “공부만 하고 놀 줄 모르는 아이는 바보가 된다고도,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라고도 새겨볼 수 있는 이 속담은 과연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경계하는 영국사람다운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에 비추어보면, 요새 부모의 강요로 공부에만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계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나는 이 속담을 부연해보면 놀이의 의미가 더 분명해지리라는 생각에 끌리는군요. 왜냐하면 나는 여기에서 다만 공부와 놀이의 병립倂立만이 아니라 그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 심지어는 상호의존 관계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공부(어른의 경우에는 노동)가 인간을 사회적 성원으로서의 생산과 의무의 굴레 속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놀이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삶의 기쁨을 베풀고 일상성日常性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놀이의 본뜻은 내일의 노동을 위해서 피로를 풀거나 새로운 활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이는 삶의 본연의 양태의 한 측면입니다.

이 측면은 어린 시절에는 노동이라는 측면보다 한결 두드러지게 나타나죠. 또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놀이 없는 어린이의 참상을 저개발국가의 잔인한 아동노동의 모습을 보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슬픈 모습은 지난날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막대기로 제 똥을 휘젓고 있는 벌거벗은 아이를 본 이상李箱저 아해에게 장난감을 주라고 외친 그 유명한 글을 여러분도 읽은 일이 있을 겁니다. 논다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산다는 것과 같은 뜻인데, 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그 기쁨이 공부라는 이름의 의무에 의해서 제한되고, 그 양자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과제가 됩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등에는 책가방을 메고 품에는 축구공을 안고 등교하는 한 아동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그 영국속담을 다시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일과 놀이 사이의 균형, 즉 사회적 생산과 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른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며, 이런 점에서 볼 때 놀이의 뜻은 인생 일장춘몽이니 놀면서 살자는 쾌락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한데, 쾌락주의뿐만 아니라 방금 말한 놀이의 상대적 중요성을 넘어서서, 그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지적하고 싶은 셋째 경우입니다. 가령 프리드리히 쉴러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놀 때에만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또 헤겔도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최상으로 쾌활한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가장 숭고하고 유일하게 진실된 진지성의 형식이다.” 둘 다 얼른 이해하기에 쉽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노동에 비해서 진지하지 않은 행위이며 심지어 노동에 방해가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져왔습니다. 특히 서양의 경우를 보면 18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초기 산업사회에서는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동의 가치가 마치 인간적 가치의 전체인 것처럼 선전되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이데올로기였죠. 그 증거로, “노동은 권태, 부도덕, 빈곤이라는 세 가지 악을 추방해준다는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였습니다. 그러니 쉴러나 헤겔은 시대사조를 어기면서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던 거죠. 인간의 진실한 행복은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어떤 특정한 목적에 예속되지 않은 자기실현에 있고, 그것이 바로 놀이라고요. 이리하여 놀이는 단순히 쾌락만이 아니라 특히 예술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아름다움, 자유, 창조, 해방과 같은 가치를 담은 최고의 행위로 떠받들려진 겁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숭고한 휴머니즘의 표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런 놀이지상주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놀이가 최고의 가치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물질적 생존에 불가결한 노동의 바탕을 무시하고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아무리 놀이가 귀중할망정 굶어죽으면서 놀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놀이에 대한 지나친 가치부여는 남들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만들어놓은 부르주아사상의 한 표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노동과 놀이의 관계에는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시사한 것처럼 노동이 없으면 놀이의 의미가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평생을 쉴 새 없이 놀고만 지낸다면 그 놀이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모든 기쁨은 그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절실한 것입니다. 마치 삶 자체의 뜻이,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 점에서 노동은 놀이를 방해하기는커녕, 놀이를 성립시키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보자면 일상적인 노동의 굴레야말로 놀이의 기쁨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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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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