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의 주유천하周遊天下: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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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그려진 세상은 이슬람교로 통합된 거대한 세계다.

이슬람교는 세계의 주요 종교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인 7세기에 성립되었지만, 성립 이후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그리하여 이븐 바투타가 여행 다니던 무렵 그 영향력은 스페인에서 중국 변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의 광대한 지역에다가 북부아프리카까지 포함된 거대 공간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이 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슬람교의 성립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존재한다.

무슬림들의 전통적인 견해는 당연히 마호메트 자신에게서 설명을 구한다. 아라비아 서부의 상인 부족에 속했던 마호메트는 탄생지인 메카 근처의 산에 들어가 명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신의 계시를 알렸다. 그는 곧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며 다녔다. 무슬림들의 견해에 따르면 마호메트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비롯한 기존의 유대교기독교의 예언자들의 계보를 잇는 존재이지만, 그가 최후의 예언자로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이슬람교에서 보는 예수는 인류 역사상 마지막에서 두 번째 예언자인데, 그가 자신의 미션을 완수하지 못해 알라가 마지막 예언자로 마호메트를 선택한 것이다). 서력 622년 메디나 시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이 지역은 마호메트를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그를 초빙하여 분란을 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므로 이해는 인간 사회가 처음으로 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새로운 공동체 움마Umma를 만든 중요한 해이기 때문에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다. 그 후 마호메트의 3대 후계자(칼리프)인 우트만Uthman 대에 이르러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승되던 마호메트의 가르침들을 모아 편집했으니 이것이 코란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성립은 당연히 알라의 뜻에 의한 것이다.

19세기 말에 유럽 학자들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텍스트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시도했다. 마호메트 탄생 이전인 6-7세기에 메카를 중심으로 원거리 교역이 크게 발전했고, 그 결과 이 지역에 심각한 사회 문제들이 발생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졌고 부자들에 대한 빈민들의 예속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호메트는 부족적인 단위를 해체하고 유일신이라는 최상의 권위에 근거하여 광범위한 범-아랍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수용하는 공동체에서는 불평등이 완화되고 모든 종류의 특권이 제거될 수 있었다. 자연히 빈민, 노예, 여성 등 차별받던 사람들부터 새로운 종교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해석은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100퍼센트 타당하지는 않다. 당시 메카는 상업 세계의 중심지가 아니라 변방에 불과했다는 점이 밝혀져서 이 해석의 근거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최근 제기되는 새로운 해석은 기존의 자료와는 아예 다른 문서들, 즉 그리스, 헤브루,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인 등 비무슬림들의 기록을 이용하여 새로운 내용을 제시한다. 코란이나 기타 전통적인 이슬람 내부의 자료보다도 이런 자료들이 오히려 마호메트 당대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려줄 수도 있다. 연구 결과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내용과 너무 달라서 때로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메카가 아닌 아라비아 북부에서 이 종교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중심지도 메디나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었다는 점 등이 그런 내용이다. 더군다나 이슬람교는 마호메트에 의해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수 세기 동안 유일신의 믿음 체계가 서서히 진화해오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특히 유대교의 종말론적 사고가 깊은 영향을 끼쳤고 또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이교 신앙 요소들이 합쳐졌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렇게 형성된 이슬람교는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슬람교로 무장한 아랍인들의 정복의 연대기를 보면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이들은 마호메트의 사망(서기 632) 직후인 634-638년에 시리아를 정복했고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640-642년에는 이집트를, 637-638년에 페르시아와 싸운 카디시야 전투의 승리 이후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으며, 니하반트 전투(642) 이후에는 아랍인들이 이란 고원에 진입해 들어갔다. 그 후 아프리카 북부지역을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711-712). 동쪽에서는 695년과 715년 사이에 트랜스옥사니아(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와 신드가 정복되었다.

숨 가쁘게 진행되던 아랍의 팽창은 8세기 초에 이르러 정체 단계에 들어갔다. 715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군이 중국에 승리를 거두어 동쪽으로는 중국 변경까지 확대된 후 안정되었고, 북쪽으로는 674-678년과 717-718년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공격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비잔틴 제국이 방어에 성공했다. 서쪽에서는 732년에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족 군대에 패해서 유럽 내의 팽창이 멈추었다. 유럽의 여러 역사학자들은 만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노트르담 성당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졌을 테고 유럽인들은 모두 코란을 읽고 있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8세기 초의 시점에서 보면 스페인으로부터 인더스 강 유역과 신장에 이르는 광대한 땅에 3,000-3,5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어 있다(이 인구는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광대한 제국은 소수의 아랍인 지배자가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750년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 지역에서 10-30퍼센트가 지배자들이고 70-90퍼센트가 피정복민이었다. 고작 수만 명의 전사들에 의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정복이 이루어졌을까?

아랍계 무슬림의 정복 및 팽창은 결코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선 아랍화이슬람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랍화는 아랍인들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타 민족이 아랍 문화를 받아들이는 현상이고, 이슬람화는 해당 지역의 기존 종교가 이슬람교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이 두 가지가 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복 초기에는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그리고 스페인에서 아랍화가 이슬람화보다 선행했다. 예컨대 이집트에서는 12세기 이후 콥트교(이집트 내의 기독교 분파)가 크게 후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슬림만큼이나 기독교도들이 많았다. 스페인에서도 기독교 공동체(모자랍)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아랍화가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서 발전된 아랍 문화를 수용하되 이슬람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이란에서는 아랍화보다는 이슬람화가 더 진행되었다. 이슬람교는 일찍 받아들였지만 아랍 문화를 곧바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굳게 지켜낸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지역들에서 서서히 무슬림이 증가하는 이슬람화 현상이 강화되었다. 서기 1000년 기준으로 이란 인구의 90퍼센트, 시리아와 이라크인의 70퍼센트, 스페인과 이집트인의 50퍼센트 정도가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예외는 이란 지역이다. 이란의 경우 이 광대한 이슬람 제국의 중심부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가 많지만 동시에 아랍화가 가장 덜 된 지역이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초기 이슬람교의 확산은 종교운동이자 강력한 군사적 팽창이었다. 그 과정은 처음부터 문제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기 형성기에 무슬림 공동체는 사실 아주 취약했다. 신의 계시가 권위의 근간이라는 점부터가 문제였다. 계시를 받았다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막강한 권위를 과시하며 이끌어가는 한 문제가 없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 같은 권위가 유지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632년 마호메트가 사망했을 때 큰 위기가 닥쳤다. 지난 10년 동안 그의 존재가 강력한 종교적정치적 리더십을 제공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부 부족들은 아예 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었고, 일부는 또 다른 예언자를 맞이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첫 번째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Abu Bakr는 이 불안한 상태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어떤 부족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강력하게 통제하고, 또 다른 새 예언자를 운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호메트가 마지막 예언자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금지 조치를 위반하는 부족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처럼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아랍 부족들에 대한 전쟁이 먼저 시작된 후 곧 외부 세계로 전쟁이 확대된 것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종교적 열정이 지속적으로 타올랐다. 전쟁의 결과 부와 토지가 재분배되면서 종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이런 강력한 동력이 작동하여 이슬람 세계는 끝없이 확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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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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