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의 주유천하周遊天下: 인도 그리고 중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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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

▲메카 순례단(13세기 삽화)

 

그의 여행의 정점은 델리의 술탄을 찾아간 것이다. 1300년경 강력한 터키계 무슬림 세력이 북부와 중부 인도에 들어와서 힌두 왕조들을 몰아내고 술탄국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곳은 1325년부터 1351년까지 무하마드 이븐 투글루크Tughluq가 통치하던 델리 술탄국이었다. 투글루크는 이슬람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븐 바투타가 인도 북서쪽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왔다. 여행을 시작한 지 8년째였던 그는 1,000마리가 넘는 말과 짐바리 노새 떼에 텐트와 사치스러운 이동식 가구를 싣고 한 무리의 동료들과 여자들, 노예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돈이 거의 바닥나던 때에 그는 델리에서 샤리아 학자를 잘 모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향한 것이다.

낯선 궁정을 찾아가서 그곳 지배자의 환심을 얻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 요소가 끼어 있다. 아시아의 궁정에서는 비단옷, 보석 장식을 한 무기, , 남녀 노예 같은 고가의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 필수요건이었다. 더구나 델리 술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선물을 안기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다. 하지만 이븐 바투타는 그럴 돈이 없었으므로 55천 디르함 은화라는 엄청난 빚을 져서 선물을 마련했다. 이렇게 접근한 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술탄의 인정을 받으면 팔자가 피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막대한 빚만 떠안고 이국땅에서 파산한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져서 그는 술탄의 호의를 입어 이 나라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였고, 결국 이곳에서 9년을 지냈다.

델리에서 고관이 된 것은 잘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달리 보면 지극히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그 기간 중 델리는 기근, 당파 싸움, 음모 등이 횡행하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게다가 술탄 투글루크는 겸허하고 공정하고 너그럽다가도 돌연 피에 굶주린 듯 학살을 일삼는 종잡을 수 없는 통치자였다. 한번은 가뭄이 들어 곡식의 가격이 폭등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술탄은 국고에서 곡물을 방출하여 시민들에게 6개월치 식량을 무상으로 배급해주었다. 이처럼 인자한 정책을 펴다가도 돌아서서 바로 잔혹한 처벌을 내리곤 했다. 길거리에 허연 덩어리가 있어서 이것이 뭐냐고 동료에게 물으면 세 토막으로 살육된 사람의 흉부요하는 답이 돌아오는 식이다.

술탄은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엄벌에 처했다. 말 한마디 잘못한 법관은 가슴 위에 벌겋게 달군 철판을 올려놓았다가 떼어서 살갗이 묻어나게 한 다음 그 상처에 오줌과 재를 뿌리는 형벌을 받았다. 모반을 하다가 잡힌 사람은 살인 코끼리에게 던져졌고, 코끼리는 처형자를 긴 코로 감아 공중에 한 번 던졌다가 땅에 떨어지면 한 발로 가슴을 밟은 다음 이빨에 달린 철판으로 몸을 두 조각냈다. 그렇지 않으면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개가 뜯어 먹게 만들고 벗긴 가죽 속에 짚을 꽉 채워 넣어 저잣거리에서 전시했다. 누가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계속 살고 싶겠는가. 이븐 바투타 역시 9일 동안 무장한 감시인들에게 잡혀 있는 경험을 한 후에는 도망갈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순례를 계속하고 싶으니 떠나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는데 돌아온 답은 쿠빌라이 칸에게 특사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노예와 첩들 그리고 1,000명의 호위 기병을 거느리고 멀리 중국으로 여행 겸 도망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델리를 떠난 직후부터 반란 세력과 비적 떼의 공격을 받았다. 죽을 뻔한 위기들을 넘기며 우여곡절 끝에 이븐 바투타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닿았다. 그토록 어렵사리 중국에 도착했지만, 정작 그 이후 여행 기록은 너무나 간소해진다. 육로와 운하로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다는데 그가 기록하는 내용은 다른 지방에 대한 서술과 비교하면 특기할 사항이 거의 없다. 기껏 기록했다는 게 여행 중에 낯선 음식과 불편한 숙소로 고생했다거나 중국인들이 그를 속였다는 이야기뿐이다. 그에게 이 이교도 국가는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고 알 수 없는 세계였던 모양이다. 중국에서 지폐가 쓰인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멍청한 관습으로 느껴질 뿐이다.

 

중국 사람들은 디나르나 디르함 같은 금은 경화硬貨를 사용하지 않는다. 금은 경화가 생기기만 하면 주조하여 덩어리를 만든다. 매매는 지폐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폐는 손바닥 크기의 종잇조각인데, 술탄의 옥새가 찍혀 있다. (……) 만일 어떤 사람이 은화나 금화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하면 시장에서는 받지도 않거니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늘날 이 중국 여행 자체가 아예 없었던 일이고 단지 주워들은 이야기로 이 부분을 쓴 게 아닐까 의심하는 학자도 많다. 술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식 사절로 중국에 갔다고 하는데, 중국 측이나 인도 측이나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직접 보았다는 기록 중에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도 많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그곳에는 비단이 대단히 흔하다. 누에가 과실에 붙어서 그 과실을 파먹고 살기 때문에 먹이가 별로 필요 없으니 비단이 흔할 수밖에 없다. 비단은 구차한 사람들의 옷감이다. 상인들이 아니었다면 비단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면옷 한 벌에 비단옷 몇 벌을 바꾼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정보이다. 그가 정말로 중국에 가기는 했을까? 사실 그의 중국 관련 기록은 그 여행의 중요도에 비하면 분량이 지나치게 적고 서술도 너무나 소략하다. 우리말 번역본의 경우 모두 1,0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책에서 중국에 관한 부분은 30쪽이 채 안 된다! 그가 중국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중국에 갔다 하더라도 그의 사고 체계가 너무나도 이슬람 세계 중심이어서 중국 문명에 대해서는 눈길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1349년에 고향인 모로코에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벌써 40대에 들어서 있었다. 어머니는 6개월 전에 흑사병으로 죽었고 고향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하던 대로 궁정에 찾아가서 자신을 광고하고 보호를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전 세계를 돌며 보고 들은 이야기가 좀 많은가. 그래서 모로코 왕에게 접근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왕은 말로 듣기보다는 글로 써 온 것을 읽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꼼짝없이 눌러앉아서 1,000쪽짜리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보록寶錄을 써 내려가는 작업에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오늘날 그가 쓴 이 원본은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여행기는 당대의 명문장가인 이븐 주자이 알 칼비의 윤문과 요약 작업을 거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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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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