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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 페로가 이야기하듯이* 때로 영화의 진행을 위해 감독이 집어넣은 부차적인 요인들이 감독의 의도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는 수가 있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인터뷰 외에 들어간 요소인 움직이는 기차 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차는 우리를 태우고 정해진 종착지로 데리고 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신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절멸 수용소가 등장한다. 이 의미는 명확하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쇼아」는 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의 이야기며,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의 죽음’의 이야기다. 인터뷰에서 누구 하나 ‘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유대 민족 전체에 드리워진 죽음의 드라마이며, 그 드라마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늘날에도 기차가 다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운명은 여전히 우리를 태우고 어디론가 죽음의 장소로 데리고 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상 같은 성격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1944년의 기억은 단순히 사라져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기억이다. 이것은 섭리를 강조하는 유대 신학의 내용이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고통을 겪은 민족은 유대 민족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다른 모든 인류사의 비극은 제쳐두고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만 “이 엄청난 고난, 절대 공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나타내려는 순간 왜곡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유대인의 고난만을 절대화하는 신학적 주장에 불과하다.
유대 신학자가 아닌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의 메시지는 대단히 불편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치라는 가해자, 폴란드인이라는 방관자,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피해자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 외의 다른 어떤 해석도 허락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폴란드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악을 방치하고 용인한 역할을 하는 ‘오직’ 방관자일 뿐이다. 이 영화는 이런 구조를 통해 유대인이 겪은 고통이 신의 섭리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또 그 고통을 가한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일했던 나치 장교의 증언을 숨어서 찍은 내용에 대해 란츠만이 말한 내용(“나는 그를 필름으로 찍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를 카메라를 통해 죽이고자 했다”)을 보면 이 작품이 증오에 기반해 있고 증오를 부추기는 특징을 가진다는 비평은 정확한 평가로 보인다.**
* 마르크 페로, 『역사와 영화』, 주경철 옮김, 까치, 1999.
** Tzvetan Todorov, Face à l'extrême, Paris : Seuil, 1991; 이상빈,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