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어두운 빛: 스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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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회

어느 날 그에게 신문사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5년 동안 연락이 끊긴 리빙스턴의 행적을 찾아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1871년 봄, 스탠리는 통역, 안내인, 짐꾼, 무장 호위병, 요리사, 영국인 수병 등 190명의 탐험 원정대를 구성하여 아프리카 동해안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8개월 후 스탠리는 정말로 리빙스턴을 찾아냈다. 그들이 조우했을 때 스탠리가 건넸다는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Dr. Liv-ingstone, I Presume?”라는 말은 세기의 명언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젊고 용기 있는 아들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성스러운 늙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신화적인 구조를 이룬다. 흡사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를 만나러 가듯, 유리가 부러진 칼을 들고 주몽을 찾아가는 듯하다. 이 탐험은 19세기의 신화가 되었지만, 실상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탠리는 여러 달 동안 끔찍한 늪지대를 통과하고, 사악한 아랍 노예상인들과 싸우고, 알 수 없는 질병과 악어 떼의 공격을 이겨낸 후 리빙스턴을 만났다고 하지만, 허풍기 다분한 스탠리의 말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와 동행했던 백인 동료는 다 죽었고, 리빙스턴도 아프리카에 남아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스탠리가 하는 말을 확인해줄 사람이 없었다. 사실 많은 짐꾼들이 있었지만 당시는 이런 하층 사람들과는 인터뷰를 하지 않던 때였다. 다만 스탠리 자신이 쓴 구절들에서 언뜻 이 모험의 실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진흙과 습기가 이 게으른 사람들의 힘을 다 빼놓았을 때 채찍으로 등을 휘갈기면 곧 적절한 행동을 시킬 수 있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멋진 모험 이야기는 지구 전체를 그들의 영토로 삼으려는 유럽인들의 상상력과 야심을 자극했다. 특히 스탠리는 사회 명사가 되어 아프리카를 백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야만의 땅으로 묘사하며 돌아다녔다. 스탠리와 리빙스턴은 인간의 품격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크지만, 제국주의의 팽창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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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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