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여인: 그러면 어느 쪽이 맞단 말인가

페이스북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블로그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링크 복사하기

63 회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사건분석은 역사학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지난 세계의 내면을 정밀하게 포착하여 그 당시의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띠고 일어났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로부터 멀리 비켜나 있는 부르주아에 대해 증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의 따뜻했던 공동체의 부활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위는 혁신적이라기보다는 과거 지향적이다. 그들의 저항 방식 역시 연면히 내려오는 과거의 축제에서 길어온 것이다. 그들은 주인 내외를 음탕한 마녀로 몰아 상징적 차원에서 가혹한 복수를 하고, 낄낄거리며 웃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언제까지나 배고프고 추운 인쇄소의 고된 노동과 다락방의 불편한 잠자리일 뿐이다. 불쌍한 고양이 수백 마리를 죽인들 이 암담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진정한 저항의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여장부 역사학자 나탈리 데이비스가 이 어둠을 밝힐 창을 하나 열었다. 여자들에 주목해보자. 가장 큰 억압 속에서 고통받았던 그 시대에 여자들이 오히려 가능성을 품고 있지는 않았을까. 마녀를 몰아낼 게 아니라 스스로 마녀가 되는 것이다. 이제 과거 축제와 의례의 언어는 아주 새롭게 변형된다. 놀아보니 그거 참 좋은 세상이더라는 생각이 머리에 남아, 다음번 기회가 될 때 실제로 시행해본다는 발상이다. 이런 일에 적극 앞장선 것은 여자들이다. 오히려 어설프게 남성 우위의 질서에 편승하던 가련한 남자들이 여성의 힘을 빌려 기존 질서를 깨는 일에 참여한다. 그녀의 논문 제목 ‘Women on Top’ 그대로 여자가 위로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포지션으로 일이 행복하게 잘 끝났을까? 과연 축제의 언어, 여성의 마력이 이 세상을 새롭게 변혁시켰을까? 그렇게 희망해볼 수는 있지만, 암만해도 데이비스의 해석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 사회의 억압적 문화는 또한 억압에 저항하는 문화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상징적 복수에 머물며 오히려 사회의 안전판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고, 거침없는 봉기로 나아가도록 사람을 깨우치는 학교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두 분석 중 어느 편이 당대 상황을 더 정확히 말해주는지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나로서는 단턴의 분석이 실상에 가까웠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역사의 현장은 실로 복합적이다. 실제로는 플러스마이너스 두 힘이 교묘히 어우러져 근대 사회를 밀어붙였다고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편이 현명한 답이 될 터이다.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

우리 현대문학 회원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내지는 타사의 메일을 차단하기 위해,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2월 19일]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