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 계몽주의 시대의 사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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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회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곡예사 같은 삶을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드나든 장소 중 하나는 감옥이었다. 도박에서 속은 사람들이든 아내를 빼앗긴 남편이든 그를 고발하여 감옥에 넣으면 그는 아는 사람의 호의를 입어 그곳을 빠져나와 곧 다른 도시로 도주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탈출이 불가능한 것으로 악명 높은 베니스의 납 감옥에 들어갔다가 탈옥한 일이다. 그의 생애는 이처럼 사기와 도주로 점철되어 있다. 자서전에서 자랑스럽게 기록하듯 필요하면 경솔한 자, 멍청한 자를 속이고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면 멀리 도망가버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만들어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시는 신분 질서가 고착되어 있고, 대부분 자신이 타고난 사회 조건에 묶여 있었지만, 그는 때 이르게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주조하며 살아갔다. 그는 늘 어떤 무엇인가로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프면 그는 의사가 된다. 누군가가 자기 운명에 대해 고민하면 그는 곧 점쟁이가 된다. 누군가가 내세에 대해 불안해하면 심지어 마술사가 된다. 우르페 후작 부인이 죽었다가 다시 어린아이로 환생하도록 도와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신분이 불리하였으므로 그것을 직접 만들어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생갈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라고 부르며 상층 귀족 신분을 위조해냈다. 그렇게 하여 귀족들을 만나고 그들을 즐겁게 하고 아첨하고, 그러고는 속여먹는 것이다.

브라가딘이라는 베니스 상원의원을 후원자로 삼은 것이 좋은 예이다. 브라가딘이 곤돌라를 타고 가다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카사노바가 응급조치를 하고 이웃 여관에 데리고 가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고마움을 느낀 브라가딘이 카사노바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미담 수준이겠으나, 이들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카사노바는 브라가딘과 그의 동료들에게 자신이 고대 유대교 신비주의 지식인 카발라의 계승자로서 수호천사를 부리는 인물로 믿게 만들어 브라가딘의 양자가 되었다. 카사노바는 브라가딘의 돈과 영향력을 빌려 3년 정도 지극한 쾌락을 누리며 살았다.

카사노바는 자신의 탁월한 자질들을 발휘하여 유럽 각지의 사회로 뚫고 들어갔다. 무엇보다 그의 몸매가 큰 장점이었을 테고, 자신이 직접 도안한 멋진 의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뛰어난 화술과 다양한 재주로 남의 이목을 끄는 능력이다. 그는 어느 곳에 가든 현장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18세기 귀족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인데, 여기에서 핵심은 곧 재미있게 말하는 능력이다. 아마 그보다 더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삶 자체가 흥미진진한 소재가 아니던가. 여행 이야기, 여성들을 만난 이야기, 그리고 책에서 읽은 박학다식한 내용들, 거기에 신비하고 마술적인 지식들도 넘쳐나서, 남녀노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인간관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졌다. 이전에 만난 사람들의 소개와 추천장이 곧 다음 사람을 만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M. M.과의 연애 사건 때 알게 된 베르니 대사의 추천서는 그가 파리에 갔을 때 사교계로 진출하고 루이 15세의 궁정에까지 들어가 주요 관료들을 알게 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곧 유명세를 얻어 많은 사람들의 부름을 받았다. 마리아 테레사 요셉 2, 프리드리히 대왕, 예카테리나 등 그야말로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당대 국왕들이 모두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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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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