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지amathia 인간의 체념諦念: 무지와 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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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

에우리피데스는 그리스 문명에서 젠더gender의 모순과 갈등이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한 작가다. 불평등과 억압이야말로 문명의 토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조화로운 문명은 아직 이 세상에 건설된 적이 없다. 주인이 노예를 착취하고,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고, ‘우리이방인을 멸시한다. 인간이 성취한 훌륭한 문명의 성과는 그런 불평등 위에서 얻어진 것이다. 문명이 온전히 잘 유지되려면 이 모순을 은폐하고 억압을 숨기는 거짓이 필요하다. 지금의 이 상태가 원래의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강변하는 논리정연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누구도 그와 같은 위선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에우리피데스는 명백하게 이 사실을 환기시킨다.

에우리피데스는 여성들에게 발언권을 준 작가다. 그는 펜테우스로 대변되는 문명의 사악한 측면을 여성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만들었다. 디오니소스의 마법에 취한 여성들은 질서와 이성의 과도함에 반격을 가했다. 그 결과 남성이 아닌 여성들, 도시가 아닌 황야, 문명이 아닌 자연, 질서가 아닌 카오스가 승리를 거뒀다. 자연이 젖과 꿀을 주고, 또 그녀들 자신이 산짐승에게 젖을 물리는 그 열락의 세계가 억압적인 그리스 문명 세계를 해체해버린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단지 포도주를 준 신이 아니라 위대하고도 광폭한 자연의 힘 자체이다. 이런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펜테우스는 짐승으로 몰려 갈가리 찢겨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명의 억압을 해체하는 디오니소스의 승리 또한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지도 보여준다. 처음에 관객들은 펜테우스의 무지와 독재에 대해 신이 응징하는 이야기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 흐름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의미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신은 과연 정의로운가? 관객들의 마음에 검은 구름처럼 의심이 일기 시작한다.

마지막 에피이소디온에서 디오니소스는 신의 형상으로 되돌아가 구름 위에서 그의 마지막 평결을 내린다. 그가 카드무스와 아가베에게 내리는 저주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너희들은 뱀으로 변하여 기어 다닐 것이다. 너희들은 동쪽의 나라로 가서 미개한 나라를 다스리고 아폴론 신전을 약탈할 테지만 다시 그로 인해 벌을 받아 멸망할 운명을 맞을 것이다. 부녀는 서로 떨어져 각자 저주의 몫을 받으리라.”

처음에 아가베는 자신이 신을 못 알아본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게 자비는 없다.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아가베는 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신도 인간처럼 행동합니까? 아가베는 당돌하고도 당당하게 신에게 따지고 있다. 신이 인간과 똑같이 분노하고 인간과 똑같이 보복한단 말인가? 카드무스 역시 신에게 간청을 드리려 하지만, 이제는 아가베가 아버지를 돌려세운다. 신의 응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언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카드무스와 아가베는 서로를 포옹하며 위로한다. 자신을 위해 슬퍼하고, 서로를 위해 슬퍼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슬퍼한다. 그 순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연민compassion을 느낀다. 그것은 함께com 고통passion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이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지혜를 얻는다. 그럼으로써 돌연 인간은 고귀함을 획득한다. 이것은 동물이나 신은 가질 수 없는 덕성이다. 동물은 단지 고통 속에 희생당할 뿐이며, 신은 아예 고통을 느끼지 않으므로 고귀한 덕성을 알지 못한다. 이제 아마티아, 즉 무지는 디오니소스의 몫이다.

구름 위에서 자못 준열한 목소리로 추방 명령을 내리는 디오니소스는 저 홀로 먼 세상에 고립되었다. 사실 그는 과도한 복수를 한 것이다. 아직 미숙한 젊은 펜테우스를 속여 처벌한 신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신과 자연의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처벌받는 펜테우스나 인간에 대한 무지로 잔혹한 복수를 행하는 디오니소스나 사실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은 정반대인 듯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너무나도 유사한 쌍생아 같은 존재들이다.

인간으로서야 달리 어쩌랴, 자신의 운명 앞에 체념할 뿐.6)

아가베는 신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결코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거의 신에 대한 경멸이 내비친다.

 

저희 자매는 핏빛 키타이론 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방황하겠나이다. 또한 신의 지팡이도 다시는 보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겠나이다. 다른 많은 사람이 디오니소스의 신도가 될지라도 나는 꿈에도 그를 숭배하지 않겠나이다.

 

디오니소스의 잔혹한 정의는 인간을 모멸했지만 놀랍게도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 신보다 오히려 더욱 고귀해지고 더 커진다. 그런데 이 연극이 다름 아닌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공연된 것임을 염두에 두자.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 마당에서 그 신은 홀로 무지의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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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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