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지amathia 인간의 체념諦念: 에우리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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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회

바카이는 에우리피데스의 마지막 작품이다. 죽기 직전인 기원전 407년에 테베에 머물며 쓴 이 작품은 그의 아들이 아테네에 가져와 기원전 405-406년 초에 초연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생전에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 작품으로 디오니소스 축제의 연극 경연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평생 그는 네 번 우승했는데, 이는 선배 작가들에 비하면 그리 뛰어난 성과는 아니다).

그는 흔히 앞선 작가들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이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같은 작품은 완벽한 구조로 인해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장대한 분위기에서 인간의 운명, 신과 인간의 관계 등을 다루는 장중한 서사는 극적인 긴장을 더해간다. 주인공들은 거의 신적인 인물들로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공유하는 약점이 아니라 소위 비극적 결함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신의 뜻에 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에 비해 후배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구조가 완전치 않고 플롯이 너무 복잡하며 초점이 오락가락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이 완벽성 면에서 뒤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적 풍모를 보이기보다는 흔히 의지가 박약하거나 몽매하거나 사악한 인물들이다. 펜테우스는 미성숙한 애송이 왕이고, 노왕 카드무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징벌을 거둬달라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인간적으로 미약한 자들이 등장하는 에우리피데스의 극은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를 지나 수준이 격하되고 변질되는 과정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이런 점들로 인해 더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정형화된 영웅 대신 나약한 주인공의 어두운 내면을 그리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현대의 심리극을 연상시킨다. 사실 타고난 위대함을 뿜어내는 웅혼한 영혼도 좋지만,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약한 인간들, 사악한 독기를 내뿜는 악당들, 고통스럽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에우리피데스는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그 모든 권력이 과연 정당한가를 묻다 보면 결국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명의 기반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밑에서 압박받는 주체들인 여성, 외국인, 노예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한편, 위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신에게도 도전한 인상을 준다. 분명 이 세계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며, 흔히 악몽으로 변모한다. 신들도 변덕스럽고 잔인하지 않은가. 종교는 독재 정치만큼이나 잔혹하고 억압적일 수 있다.

바카이는 그리스 세계의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이 복잡한 극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의 극에서는 신앙과 회의, 이성과 비합리성, 그리스와 외국,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같은 대립적인 힘들이 명확하게 양분되지 않다가 어느새 합쳐져 카오스로 회귀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누구도 묻지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우리 내면의 어둠, 모순에 가득 찬 문명의 하층, 미분리未分離의 혼돈과 불확실성이 그득한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가서 공포에 찬 체험을 하도록 만든다.

여느 다른 고대 문명과도 구분되는 그리스 문명의 특질은 우리가 누구이며, 이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며,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마땅한지를 캐묻는 데에 있다. 그렇게 묻고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쌓아 올려 만들어낸 그 문명은 이제 어디에 와 있는가?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세계가 전성기를 지나 쇠락의 길로 접어들 무렵, 작가들은 또다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는 노을처럼 쇠락기의 문화가 발하는 찬란한 빛은 때로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은 시대를 넘어 오늘에까지 영감의 빛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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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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