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지amathia 인간의 체념諦念: 테이레시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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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

바카이의 무대는 테베 시의 입구다.* 무대 양쪽으로는 멀리 길이 나 있다. 한쪽 길은 키타이론 산(황야)으로 이어져 있고, 다른 한쪽 길은 시내(문명)로 이어져 있다. 무대 아래에는 포도 덩굴로 뒤덮인 세멜레의 무덤이 있어서 그 언저리 바위에서 가끔 연기가 피어오른다.

극이 시작되면 짐승 가죽옷에 웃는 마스크를 착용한 배우가 등장하여 관객에게 자신이 디오니소스 신임을 선언한다. 그는 어머니를 능멸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동시에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을 한 채 테베에 왔다는 사실을 장중하게 설파한다. 그가 이제부터 할 일은 사람들을 미치게만드는 것이다. 이는 이성에 매몰되어 신앙을 비웃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에 눈뜨게 하는 의미이다. 이 프롤로고스(prologos, 극의 도입부에 한 인물이 등장하여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개요를 제시하는 부분) 뒤에 무대 양쪽에서 코러스가 노래하며 입장하는 파로도스parodos가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코러스는 아시아에서 이곳까지 디오니소스를 따라온 여신도들, 바카이를 나타낸다. 이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코러스의 리더coryphaeus가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극의 줄거리에 개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서 배우들이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에피이소디온episodion과 코러스가 노래를 부르는 스타시몬stasimon이 이어진다. 그리스 비극은 대개 네다섯 개의 에피이소디온과 스타시몬을 통해 스토리를 완결하고, 마지막으로 코러스가 합창을 하며 퇴장하는 엑소더스exodos로 막을 내린다.

첫 번째 에피이소디온에서는 늙고 나약한 모습의 카드무스와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한다. 이들은 테베의 최고 원로들이다. 전왕 카드무스는 연로하여 어린 외손자 펜테우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최고 권위를 누리는 인물이고, 테이레시아스는 국가의 중대사마다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었던 예언자다. 그런데 이들이 디오니소스 신도의 차림새를 하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춤을 추며 산으로 가려는 중이다. 두 사람은 이미 늙고 힘없는 존재로 전락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두려운 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 들면서 얻은 노인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젊은 국왕 펜테우스가 달려오다가 이들과 마주친다. 그는 이 나라의 여인들이 모두 키타이론 산에 올라가서 춤추고 있으며, 그중에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아가베도 끼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이 모든 것이 계집애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외국 출신의 젊은 사기꾼 디오니소스에게 속아 넘어간 때문이며, 더 나아가 산으로 간 여자들이 신을 맞이한다는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아프로디테를 경배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모두들 어두운 곳에서 섹스에 탐닉하고 있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젊은이다운 순진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문제의 사기꾼 디오니소스를 체포하고 여인들도 모두 처벌하리라 마음먹으며 왕궁으로 가다가, 다름 아닌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테이레시아스마저 디오니소스의 신도가 된 것을 알게 된다. 펜테우스는 사슴 가죽옷과 덩굴관으로 치장한 두 노인에게 미친 짓을 그만두라고 소리친다.

테이레시아스는 젊은 왕에게 디오니소스신의 의미를 설명한다. ‘인간 세계에 가장 중요한 두 신이 있으니 하나는 데메테르 여신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 신이다. 땅의 여신 데메테르는 곡식으로 인간을 채워주지만, 그 여신의 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디오니소스 신은 포도에서 흘러나오는 수분으로 술을 발견했다. 우리는 물론 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히 먹고살아가는 당장의 필요에만 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질서만 강조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펜테우스는 전제군주(tyranos, 僭主)이다.’ 테이레시아스에 의하면 오히려 그야말로 미친 인간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이처럼 신의 뜻을 헤아릴 줄 알게 된 데에는 특이한 사정이 있었다.**

이것 역시 제우스와 헤라 사이의 다툼이 문제였다. 어느 날 제우스와 헤라는 흥미 있는 논쟁을 했다. 사랑할 때 남자가 더 행복한가, 여자가 더 행복한가? 남성 신인 제우스는 여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여성 신인 헤라는 남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오랜 논쟁에도 결판이 나지 않자 제우스는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테이레시아스밖에 없다며 그를 올림퍼스로 불렀다. 테이레시아스가 다른 인간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아직 평범한 남자였던 시절, 테이레시아스는 어느 날 산길을 가다 뱀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것을 보고 막대기로 뱀들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사랑을 방해받은 뱀들은 신통력을 발휘해서 테이레시아스를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몸과 마음 모두 완벽한 여자가 된 테이레시아스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7년을 살았다.

어느 날 다시 산길을 가던 여자 테이레시아스는 또 뱀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도 다시 막대기로 뱀들을 억지로 떼어놓았고, 그러자 뱀들이 다시 테이레시아스를 남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본 사람이 되었다. 제우스가 그를 부른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신들 앞에 불려 온 테이레시아스에게 제우스가 물었다.

그대는 남자로도 살아보았고 여자로도 살아보았으니 알 것이다.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과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행복했는가?”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답했다.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이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보다 아홉 배 더 행복했나이다.”

제우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대답이었다. 논쟁에서 지게 된 헤라는 앙심을 품고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해버렸다. 제우스로서는 난감했으리라. 자기 때문에 불려 왔다가 엉겁결에 장님이 된 테이레시아스를 안쓰럽게 여긴 제우스는 그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었다. 육신의 눈을 잃은 대신 영혼의 눈을 열게 된 테이레시아스는 신들이 정해놓은 길을 보게 되었고, 그리스 최고의 예언자가 되었다.

이것이 테이레시아스에 관해 통상적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신이 정한 오묘한 뜻을 받아 인간에게 전해준다. 그로 인해 인간은 선악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면 테이레시아스의 중재를 통해 신의 뜻을 받아들이면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안티고네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테이레시아스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다. 그가 전하는 신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 닥쳐온다.

그러나 선배 작가들과 달리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나오는 테이레시아스는 힘없는 허약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는 디오니소스가 신이라는 것만 알아볼 뿐, 신의 뜻을 명확하게 전달받지는 못한다. 예언자가 번역해주지 않는 신의 뜻을 우리는 알기 힘들다. 이제 신에게 접근하는 길은 오직 신 자신뿐이다. 그러나 때론 한없이 자애롭다가도 때로는 지나치게 잔혹한 그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는지 모호하다. 인간 세계에 복수를 하러 온 디오니소스가 바라는 정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뜻을 명확히 전하지 못하는 허약한 예언자의 모습은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처럼 에우리피데스가 그리는 우주는 어둡고 혼란스럽다. 그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갈 뿐이다.

 


 

* 에우리피데스, 희랍비극 2, 여석기 외 옮김, 현암사, 1995, p. 377.

** 주경철,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산처럼, 2002, p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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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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