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지amathia 인간의 체념諦念: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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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

Ⓒ「바쿠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作)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달리 로마의 바쿠스는

신적인 광폭함보다는 도취와 유흥의 속성이 강해졌다.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의 바쿠스) 신화는 매우 다양하지만 널리 알려진 판본에 의하면 그는 제우스신과 인간 세멜레 사이에서 잉태되었다. 늘 그렇듯 문제의 근원은 제우스의 바람기였다. 올림퍼스의 주신主神이자 우주를 주관하는 신들의 신이라지만 평소 제우스가 즐겨 하는 일은 성희롱, 성폭력이었다. 틈만 나면 천상에서 지상 세계를 내려다보다가 어여쁜 처녀를 보면 채신머리없이 소, 거위, 독수리, 심지어 개미로 변신하여 접근했다. 테베의 국왕 카드무스의 딸 세멜레 역시 그렇게 제우스가 덜컥 임신시킨 많은 여인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의 주요 임무는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여자를 악착같이 찾아내서 사납게 응징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헤라가 노파로 변신, 세멜레에게 접근하여 살살 구슬렸다. “그래, 아기 아빠는 누구야?” 역시나 아이 아빠가 제우스라는 답이 돌아왔다. 헤라는 교묘한 책략을 써서 복수를 했다. “거짓말도 유분수지, 남자친구가 어떻게 제우스라는 거야? 진짜 제우스가 맞다면 헤라 여신과 만날 때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해봐.”

세멜레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사실 그녀의 언니들도 제우스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믿지 않고 조롱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다시 제우스를 만났을 때 자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 진짜 날 사랑한다면 꼭 들어줘야 해하고 우격다짐을 했다. 제우스가 꼭 들어주겠다며 스틱스강을 걸고 맹세까지 한 후 부탁이 뭐냐 물으니 한다는 말이 본모습을 보여달란다. 원래 남자의 본모습이란 봐야 좋은 일 하나 없는 법이다. 제우스는 이 미련한 인간아하며 할 수 없이 신의 형상을 드러냈다. 천둥 번개 치는 제우스의 형상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세멜레는 제우스가 내뿜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래도 신의 씨앗이어서 그런지 태아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제우스는 잿더미 속에서 아직 태아 상태의 디오니소스를 수습하여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심었다. 허벅지를 인큐베이터로 삼은 것은 헤라의 해코지를 막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헤라가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 해도 설마 남편 허벅지에 다른 여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리라고는 상상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자 제우스는 이카리아섬으로 가서 아이를 출산했다. 이렇게 해서 디오니소스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신, 혹은 두 번 태어난 신이 되었다. 그러나 헤라의 질시를 받는 그가 올림퍼스 신들의 궁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광기에 빠져 아시아 세계 각지를 방랑했다. 그를 치유해준 것은 프리기아의 여신 키벨레였다. 생식 능력이 뛰어난 대모신大母神인 키벨레는 디오니소스에게 종교의식도 가르쳐주었다. 그는 문명 세계와 동떨어진 자연에 머무는 동안 포도를 재배하는 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황야의 신, 초목의 신, 술의 신, 도취의 신이 되었다(너무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많은 이름의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후 디오니소스는 인도를 비롯한 각지로 돌아다니며 술과 함께 자신의 신앙을 전파했다.

그렇다고 디오니소스를 단지 술에 취해 있는 명랑한 신의 모습으로만 그리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그는 광기와 극단의 속성 또한 함께 지니고 있다. 원래 음주는 종교제의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은 신비의 황홀경을 여행하고 오는 것, 다시 말해 영혼이 내 몸에서 빠져나와 다른 어떤 세계를 경험하는 엑스타시스ékstasis였다. 초기 기독교에서 음주를 막으려 했던 이유도 이것이 고대 이교異敎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술이 종교적 의미를 띠는 것은 여러 문명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일로, 예컨대 아스테카 문명에서는 축제 기간이 아닌 때에 몰래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신의 세계로 향하는 데에 쓰이는 신성한 물질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과 부활의 신이라는 점은 초목의 신이라는 점과 통한다. 가을에 모든 잎들이 져서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봄이 되면 다시 생명의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가 가르치는 교리 역시 이와 비슷하여, 현재 이곳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삶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 뒤에 부활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런 해방의 요소가 있기에 피압박 노예와 여성, 하층민들로부터 열성적인 신도를 모을 수 있었다. 억압받는 이들의 축제인 디오니소스제는 특이한 광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속에 모여든 여인들은 술을 마시고 방울을 딸랑거리며 광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이 절정에 이르면 살아 있는 소에 달려들어 손으로 생살을 찢어 먹었다. 이는 성체성사(聖體聖事, Eucharist)를 연상시킨다. 신의 영이 동물에 들어가고 그것을 사람들이 뜯어 먹음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여신도를 거느리고 아시아 세계를 떠돌던 디오니소스는 이제 그가 잉태되었던 그리스 세계로 돌아와서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일부 국가 지도자들은 광기와 취기의 신흥종교가 들어와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억압하려 했다. 그중에는 테베의 젊은 왕이며 디오니소스와 사촌간인 펜테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를 굴복시키고자 테베로 들어가려 한다.**

이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카이의 배경이다.

 


 

* 제우스가 왜 그토록 여색을 밝혔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설명은 이러하다. 원래 그리스 세계에는 수많은 부족이 있고 거기에는 모두 주신과 여신이 있었다. 산 하나 넘으면 신이 있고 강 하나 건너면 또 다른 신이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지배하면 신들의 세계에도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원래 악마는 남의 종교의 신이라 하지 않던가. 정복당한 부족의 신은 대개 사악한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여신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제우스를 주신으로 하는 강력한 부족이 계속 다른 부족을 정복할 때마다 그 여신들은 제우스와 밀회를 즐기다 때로는 벼락을 맞아 죽고, 때로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치고, 때로는 하늘의 별이 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제우스가 수많은 여자를 만나는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지극히 중요한 신이면서도 올림퍼스의 12신의 계보에 들지는 않는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나 서아시아 등 외지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다만 아주 일찍 그리스 세계에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디오니소스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제우스와 연관되어 숭배를 받았다. 발터 부르케르트,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남경태 옮김, 사계절, 2008,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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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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