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비아: 실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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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로빈슨 크루소파리대왕과 같은 문학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 무인도에 사람들이 남겨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타비아호 사건은 그런 질문에 답을 제공할 실마리를 준다.

바타비아호의 무덤에서 인간은 결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디포가 예상한 것과 달리 유럽의 우수한 문명 요소들이 낯선 환경, 위기의 순간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지는 못했다. 인간의 이성, 혹은 좁게 보면 유럽의 이성은 만능의 열쇠가 아니다. 유럽 대륙 본거지에서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관성에 따라 자기 기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다른 대륙 혹은 낯선 자연 상태에서는 그들의 이성이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앙 역시 그리 단단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도를 넘어서는 순간 십계명은 눈 녹듯 사라지는 모양이다. 신은 그 먼 인도양의 섬까지 찾아오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날개아래 보호받기를 갈구하는 바스티안스 목사의 염원은 마음껏 저주를 퍼붓고 희한한 이단 논리에 물든 망나니들이 피 뚝뚝 듣는 바다사자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농담만도 못한 결과가 되었다. 이성과 신앙의 힘을 두루 갖춘 유럽인이 자연과 이교 문명에 맞서 고귀한 삶을 재건하리라고 예측한 디포의 설은 기각되어 마땅하다.

윌리엄 골딩의 견해는 디포의 견해에 비해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는 문명이 자연을 조금씩 정복하여 원래의 문명을 복구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연 상태가 문명 요소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바타비아호 선원들이 정말로 완전히 그들의 문명 요소들을 집어던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위계를 만들어 본토의 지배계급 흉내를 내고, 지금껏 강요받은 정통기독교 교리는 내던지지만 대신 기묘한 이단 교리가 그것을 대신한다. 서로 패가 갈려 끔찍하게 싸우고 살육을 하지만 그것은 이빨과 발톱으로 물어뜯는 원시의 싸움이 아니라 머스킷 총을 쏘고 유럽 군대의 전략을 이용한 근대적 전투다. 어찌 보면 그곳에서는 유럽이 해체된 게 아니라 도착된 방식으로 복제된 게 아닐까? 허약한 문명은 스스로 사라지고 오직 인간 내면의 부조리함이 모든 것을 좌우하리라고 본 골딩의 설 역시 기각하는 게 맞다.

바타비아호 사건은 세계로 팽창해가는 근대 유럽 문명의 다이내믹한 힘의 이면에 얼마나 사악한 힘이 도사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먼 이국의 섬은 이성과 신앙에 의해 에덴동산으로 변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유럽 문명의 무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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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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