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비아: 로빈스네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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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회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사고 실험은 유럽 문명의 절대적 우위를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성과 신앙의 힘을 두루 갖춘 유럽인은 자연과 이교 문명에 맞서 고귀한 삶을 살리라는 것이 디포의 예측이었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예측만 있는 것은 아니며, 정반대되는 해석의 사례 역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그중 하나다.*

소설은 세계 어디에선가 핵폭탄이 터진 상황에서 영국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적의 공격을 받아 태평양 위의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른들은 모두 죽고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의 소년들만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상황을 설정해놓았다. 로빈슨 크루소와는 달리 어른이 아니라 아이를, 그리고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무인도라는 무대에 집어넣어본 것이다. 이미 타락한 어른들과는 달리 순수한 아이들은 조금 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처음에는 랠프라는 소년을 지도자로 삼아 제법 질서 잡힌 조직이 이루어진다. 회의에서는 소라조개를 가진 사람이 발언권을 가진다는 규칙을 만들기도 하고, 안경알을 이용해 불을 지펴 산꼭대기에 구조대를 요청하는 봉화도 피워 올린다. 그러나 이런 조화로운 상태는 잭이라는 소년이 따로 분파를 만들어 랠프 일당에 도전하면서 깨지게 되고, 얼마 안 가서 분열과 갈등이 시작된다. 사태를 극적으로 전환시킨 중요한 요소는 짐승에 대한 믿음이다. 우연히 산 정상에서 낙하산병의 시체를 본 꼬마들이 짐승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두려움의 대상인 짐승에 대한 믿음이 퍼지게 되는데, 잭은 이 근거 없는 루머를 이용해서 자신의 위세를 강화하려 한다. 사냥해서 잡은 멧돼지 대가리를 막대에 꽂아 짐승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함으로써 신비한 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짐승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아챈 사이먼이라는 소년은 살해당해 바다에 버려진다.

이제 잭 일당은 문명을 벗어던지고 점차 야만인으로 타락한다. 얼굴에 색칠을 하고 마스크를 쓴 채 춤추는 그들은 피 흘리는 사냥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들과 적대하는 반대편 꼬마들을 거침없이 고문하며, 친구를 살해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반대파 랠프를 죽이기 위해 야만으로 돌아간 소년들은 숲 전체에 불을 놓고 괴성을 지르며 그를 쫓아간다. 쫓고 쫓기는 인간 사냥 끝에 그들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섬 전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찾아온 영국 순양함의 장교와 맞닥뜨리면서 야만의 게임은 끝난다.

순진무구할 것으로 보이는 소년들 역시 핵전쟁을 일으키는 어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추악한 결과를 가져왔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 것일까? 골딩의 견해는 지극히 비관적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 결함의 근원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불완전성 혹은 사악함의 표현이 바로 소설 제목인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원래 곤충의 왕’, 곧 사탄을 뜻한다)’이다. 파리대왕에게 사로잡혀 있는 인간 본성은 어둠의 심연이다. 순진한 어린아이들을 풀어놓아 그들끼리 살게 만든 실험 결과는 불타는 지옥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 내면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윌리엄 골딩은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의 힘은 허약하기 짝이 없으며, 인간은 언제든지 문명의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기꺼이 야만으로 돌아가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사냥꾼이 된다고 보았다.


 

* 주경철,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사계절, 2009, pp. 25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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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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