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비아: 공포와 야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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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회

펠사르트는 곧 폭도들을 심문하였다. 현장 수색 끝에 코르넬리스에게 쓴 충성 서약서 사본들도 찾아냈다. 그는 우선 코르넬리스부터 고문을 가하여 죄를 밝혀냈다. 애초에 코르넬리스는 의리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거리낌 없이 부하들의 죄상을 폭로했다. “저 사람은 자백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누군가 죽어야 할 때마다 항상 기꺼이 나서서 열심히 일했죠.” 이런 식의 배신에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응대했다. 모두 서로를 비난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큰 문제 없이 소상히 밝혀졌다.

펠사르트는 이들 중 다수를 현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사르담호에 난폭한 폭도들을 모두 태우고 가는 게 쉽지 않을 것이므로, 아예 일부는 털고 가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주범인 코르넬리스는 두 손을 자른 후 교수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그 외 주동자급 사람들은 한쪽 손목을 자른 후 교수형, 그리고 다른 인물들은 단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끌과 망치를 이용해 코르넬리스의 두 손목을 거칠게 잘라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르넬리스는 교수대에 매달리는 마지막 순간에도 복수할 거야!”라고 외쳐댔다.

펠사르트는 생존자 77명을 태우고 자바로 돌아갔다. 심판받지 않은 폭도 잔당들은 바타비아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중 다섯 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다른 사람들은 채찍질을 당했으며, 특히 야콥 피터르스는 바퀴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유럽 문명이 고안해낸 가장 잔혹한 처벌 방식으로, 이번 사건에서 마지막으로 야만의 정점을 찍었다. 형 집행자는 무거운 몽둥이를 이용해서 죄수의 손가락과 발가락부터 시작해 점차 몸 안쪽의 뼈들을 전부 분질렀다. 이미 걸레처럼 된 몸을 이리 꺾고 저리 꺾어 바퀴에 묶고는 마지막으로 죄수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을 느끼도록 갈비뼈를 박살냈다. 그다음 차축 한쪽을 땅에 깊이 박아 사형수를 묶은 바퀴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야만성을 열대의 벌레들이 달려들어 완수했다.**

 


* 펠사르트는 그리 공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렸다. 코르넬리스가 사로잡힌 이후 새 지휘자가 된 와우터 로스와 광기에 휩싸여 잔혹한 살인을 일삼은 소년 펠흐롬에게 사형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 내려놓는 처벌을 했다. 후일 그 지역 원주민 중에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혹시 그 두 사람의 후손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하지만, 그 뒤에 있었던 유사한 사건 당시 이 부족 내에 들어가 살게 된 다른 백인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더 크다.

 

** 저항군의 지휘자였던 헤이스만이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야콥스 선장은 선상 반란죄로 추궁받았지만 고문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틴 끝에 증거 부족으로 사형을 면했다. 그렇지만 후일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감옥에서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상인 펠사르트 역시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재산을 압류당한 후 1년 이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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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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