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찬 차르: '아메리카화'된 예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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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회

   

◀ 「과달루페의 성모」   /   ▶ 「성 그레고리의 미사」

 

과달루페의 성모Nuestra Señora de Guadalupe’가 대표적인 예다. 원래 멕시코 시 북쪽의 테페약Tepeyac 언덕에는 일종의 지모신 같은 토난친Tonantzin 여신을 모신 작은 신전이 있었다. 스페인인들의 정복 때 이 신전이 파괴된 이후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곳에 작은 성당을 건축하여 이교 신전을 대체했다. 그렇지만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대체가 아니라 연속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곳에 순례를 왔고, 가톨릭 교회는 내용이 어떻든 이것을 용인했다.

20년 뒤에 대주교가 이 성당 안에 몰래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을 갖다 놓았다. 그러자 이것이 인디언들에게 일종의 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느 날 갑자기 신령스러운 그림이 저절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 주민들은 점점 더 자주 이곳을 찾아왔다. 교회는 이런 상태를 의도적으로 이용해서 마리아 숭배를 확산시키려 했고 그런 의도로 전설을 하나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 후 1648년에 멕시코 대성당의 한 참사회원이 이에 대한 책을 씀으로써 전설의 내용이 완전히 사실처럼 굳어졌다. 그 내용은 이런 식이다. 후안 디에고Juan Diego라는 인디언이 꽃을 따러 갔는데 그에게 성모가 나타났다. 디에고는 멕시코 시 주교를 찾아가 꽃을 담았던 망토를 펼쳐 보였는데, 그 직물 위에 과달루페의 성모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숭배되는 중요한 성상으로 남아 있다. 작은 언덕에 내려온 성모는 멕시코의 과거 이교를 지우고 가톨릭 신앙을 세우는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이 신앙은 인디언 문화도 아니고 유럽 문화도 아닌 멕시코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이 신앙은 점차 큰 위세를 떨쳤다. 처음에는 단지 그 지역의 수호자였으나 17세기에는 멕시코 시 전체의 수호자가 되었고 18세기에는 멕시코 국가 전체의 수호자로, 19세기에는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수호자처럼 되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신앙으로 성장해서, 가톨릭 측은 2002년에 후안 디에고를 성인으로 시성諡聖했다. 사실 그런 인디언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교회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무리한 행위를 한 이유는 마리아 숭배를 현지화하고 강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 밀려들어오는 개신교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가톨릭 교회와 인디언 공동체를 연결하는 역사적인 연계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가르친 기독교는 당연히 예수의 희생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요소는 아메리카 원래 문명의 핵심 요소였던 인신 희생의 철학과 내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예수의 이미지는 늘 피가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이는 명백하게 콜럼버스 이전의 인신 희생을 연상시켰다. 16세기에 멕시코에서 그려진 성 그레고리의 미사와 같은 그림이 그런 사례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예수상은 상처가 어찌나 깊은지 상처 틈으로 척추골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희생은 유일한unique 성격의 것이며 그 의미가 미사를 통해 재현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이를 과거의 인신 희생의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다. 양측은 서로 자신의 문화적 틀을 통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 사회와 새로운 기독교 사회를 연결하는 강력한 끈이 되었다.

멕시코 가톨릭 신앙은 그 이후 변화해가는 사회와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바로크 시대에 멕시코 교회는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고 성모 숭배를 강화했으며 성지순례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계몽 시대의 스페인 부르봉왕조는 이런 민중 종교적인 요소들을 강력하게 탄압하려 했다. 그러한 신앙의 주 무대가 되기 십상인 소성당을 폐쇄하고 성상들과 축제도 금지시켰다. 이런 탄압에 맞서 인디언들은 이제 그들의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19세기에 들어서 독립을 획득한 이후 정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하는 동시에 역시 민중 기독교를 억눌렀다. 또 멕시코 혁명(1910-1920) 시기에도 그런 민중적 성격이 강한 멕시코 가톨릭 신앙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으로 치부되어 강력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민중적이고 토착적·혼합적인 가톨릭 교회는 끝까지 버텨왔다. 더 나아가서는 20세기 후반부터 오히려 미국을 정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미국 내 멕시코인들의 강력한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독특한 종교를 이해해야 한다. 적대적인 세계에 맞서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결속을 강화하는 데에는 이런 믿음의 공유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라티노(latino, 라틴계 사람)의 힘은 사파타Emiliano Zapata나 판초 비야Pancho Villa 같은 멕시코 혁명가의 힘이라기보다 차라리 과달루페의 성모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식민정부를 이겨낸 멕시코인은 이제 앵글로 색슨 세계에 대해 버텨내는 힘을 키우고 있다. 그런 힘의 근원은 계몽사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톨릭의 현대화와 신구교 간의 일치 등의 교리를 정리한 1959년의 개혁 공의회)의 필터링을 거친 유럽 가톨릭과는 매우 다른 멕시코 특유의 신앙이며, 또 그 기저에는 유구한 아스테카 문명의 유산이 잠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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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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