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는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를 뒤집어 보더니 오쿠보에게 “이것 좀 봐” 하고 들이밀었다. 혹시 뒷면에 중요한 정보가 있었나? 얼른 보았지만 역시 숫자의 나열뿐이었다.
“마권 예상 번호 아니에요?”
“아니야.” 나루세는 그렇게 말하고 ‘3, 2’라고 적힌 쪽을 위로 뒤집었다. “저런 상태에서 경마 예상을 하겠어?”
“저라면 안 하겠지요.” 몬마 씨라면 할지도 모르지만.
“아까부터 몬마 씨는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지 않았나?”
칼에 위협당하면서도 몬마는 때때로 고개를 돌리거나 뒤쪽을 쳐다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 동작이었지만 유심히 관찰하면 확실히 보였다. “맞아요. 뛰어내리려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나루세가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종이를 내려다보고 고민에 빠졌다.
“오쿠보, 이런 외국 격언을 알아?”
“왜 그러세요, 갑자기?”
“거인 위에 올라타면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아 그거.” 제 애인이 가르쳐 준 격언이에요, 하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나루세가 말했다.
“저 아파트 위에 올라간 몬마 씨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거야.”
_38~39쪽
교노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스톱워치를 보더니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정확히 4분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쇼는 끝났습니다. 텐트를 접고, 피에로는 의상을 벗고, 코끼리는 우리에 넣고, 서커스단은 다음 마을로 이동하렵니다.”
“구온.” 나루세가 옆에 있는 구온에게 고개를 바싹 대고 재빨리 말했다. “저쪽.” 통장 정리기 옆에 있는 남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넌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교노가 “어이, 가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인질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교노와 구온도 똑같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루세는 카운터에서 뛰어내렸다. 나머지 두 사람도 뒤를 따랐다. 출구를 향해 달렸다. 평소와 똑같은 절차로, 평소와 똑같이 움직인다. 작업이란 그런 지루한 일들의 연속이다. 나루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동문으로 향했다. 옆에서 달리는 구온이 중간에 멍하니 서 있는 손님에게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_193쪽
교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루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어쩔 셈이야? 오늘 우리를 굳이 불러 모으다니.”
“만약 그 아가씨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 해서.”
“나루세, 이런 말은 뭐하지만 늦었어. 우리는 그 은행에서 빠져나왔고 사장 영애도 사라졌어.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 봤자 이미 개봉이 끝난 영화를 두고 ‘그 영화, 실은 재미있대’라고 떠드는 거나 마찬가지야. 늦었어, 늦었어. 의미가 없다고.” 교노는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우리 커피는 참 맛있어, 라고 중얼거렸다.
“개봉이 끝난 줄 알았는데 지방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면 어쩔래?” 나루세는 웃었다.
“무슨 뜻이야?”
나루세는 의미심장하게 구온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아하.” 구온이 씨익 웃었다.
“어이, 알아듣게 얘기해.” 교노가 짜증을 냈다.
“그때 구온이 로비에서 그 남자의 지갑을 훔쳤거든. 여자 뒤에 있던 남자에게서.”
_206~207쪽
“형씨, 미안하지만 그대로 얌전히 있어.” 럭비 선수처럼 탄탄한 체형이라 위압감은 있지만 목소리가 높고 태도도 온화하다.
“그나저나 잘될까요?” 핸들을 쥔 니트 모자의 오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쓰쓰이가 돈을 가져올까요?”
“그건 가 봐야 알지.” 고니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동승한 요시코의 심경을 배려하듯 덧붙였다. “뭐, 아무리 쓰쓰이라도 딸을 위해서는 돈을 마련하겠지.”
“아뇨, 저희 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지는 걸 싫어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요시코는 달관한 건지 비관하는 건지 그런 소리를 했다.
“맞아, 네 아버지라면 돈이 아까워서 너를 버릴 거야.” 운전석의 오타가 말했다.
“너, 남의 부모를 나쁘게 말하면 못써.”
“죄송합니다, 고니시 씨.”
“어이,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고.” 오타가 도중에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뭐야, 이 모자란 범인들은? 구온은 한숨을 쉬며 물어보았다. “그 모자하고 안경은 역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입은 막지 않아서 자유롭게 떠들 수 있었다.
“당연하잖아.” 오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인질에게 얼굴을 들키면 안 돼. 만약 들키면 그 인질을 처리해야 하지.”
처리라는 말에 요시코가 순간 움찔 떨었다. 구온은 “그런 말을 할 거면 서로 이름도 부르지 말아야지”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_261~262쪽
제1장
악당들은 각자 일상을 보내며, 때때로 남을 돕는다
‘거인 위에 올라타면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유리 집에 사는 사람은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
‘계란을 깨지 않으면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
‘털 깎인 양은 신도 미풍으로 감싼다’
제2장
악당들은 과거의 실수를 교훈 삼아 대책을 세우지만, 은행을 습격한 뒤에 문제를 깨닫는다
‘한번 물리면 다음에는 조심한다’
제3장
악당들은 동료를 구출하려고 모의하고 행동한다
‘어리석은 자는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으로 돌진한다’
제4장
악당들은 계획대로 적진에 뛰어들지만, 돌발 상황에 당황한다
‘최대의 부는 약간의 부에 만족하는 것이다’
보너스 트랙
‘바다에는 놓친 것만큼이나 훌륭한 물고기가 있다’
작가의 말
■ 지은이_ 이사카 고타로伊坂幸太郞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름 앞에 항상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 한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중국, 대만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으며, 국경을 넘어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에게 선물받은 책에서 ‘짧은 인생을 상상력에 내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는 문장을 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 니시무라 교타로西村京太?의 이름과 같은 획수의 한자를 조합한 필명 이사카 고타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닮으라는 바람을 담아 가족들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2000년 『오듀본의 기도』로 신초미스터리클럽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2년 『러시 라이프』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3년 추리소설 독자를 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중력 삐에로』를 시작으로 2004년 『칠드런』『그래스호퍼』, 2005년 『사신 치바』, 2006년 『사막』, 2008년 『골든 슬럼버』로 여섯 차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나 ‘집필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고사한다. 2004년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로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같은 해 『사신 치바』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에서 수상. 2008년 『골든 슬럼버』로 야마모토슈고로상과 서점대상뿐만 아니라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올라 3관왕을 달성했다. 서점대상 제1회부터 제6회까지 매회 최고작 10위권에 선정된 유일한 작가로, 2017년에는 『화이트 래빗』『AX』, 2018년에는 『후가와 유가』, 2019년에는 『고래머리의 왕』을 발표했고, 2020년에는 『역소크라테스』로 시바타렌자부로상을 수상하는 등 변함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기상천외하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중층적이고 정교한 구성력과 경쾌한 필치로 풀어내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비롯해 13개 작품이 영화화되는 등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영화나 연극, 만화, 드라마 같은 다른 분야로도 확장되어 독자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 옮긴이_ 김선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다양한 매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일본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사카 고타로의 『러시 라이프』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종말의 바보』를 비롯하여, 「소시민 시리즈」 『야경』 『왕과 서커스』 『책과 열쇠의 계절』 『꿀벌과 천둥』 『고백』 『쌍두의 악마』 『완전연애』 『경관의 피』 『자물쇠 잠긴 남자』 등이 있다.
4인조 강도단이 은행도 털고 정의도(?) 구현한다
부도덕한 듯 정의롭고, 평범한 듯 비범한
레전드 4인조 강도단의 탄생!
?오늘날 이사카 고타로가 누리는 절대적 인기의 시초가 된 작품? _센가이 아키유키(미스터리 평론가)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제왕’ 이사카 고타로의 대표작 「명랑한 갱 시리즈」(전 3권)가 김선영의 번역으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제1권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2003)와 제2권 『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2006)에 이어 무려 9년의 공백을 깨고 선보인 제3권 『명랑한 갱은 셋 세라』(2015)까지, 1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사랑을 받으며 일본 내 누적 판매 부수 230만 부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경쾌한 문장과 탁월한 유머, 치밀한 복선, 그리고 악당인지 영웅인지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명랑한 갱 시리즈」는 “일본 최고의 스토리텔러”(미스터리 평론가 구사카 산조)인 이사카 고타로의 여러 소설들 중에서도 단연 오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신초미스터리클럽상을 수상한 등단작 『오듀본의 기도』(2000)에서 수수께끼의 섬을 무대로 압도적 상상력을 보여 주고, 『러시 라이프』(2002)로 “한 장의 장대한 트릭아트”라는 극찬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그는 세 번째 책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등단 3년 만에 상업적 성취까지 이루게 되었다. 『사신 치바』 『칠드런』 『골든 슬럼버』 등의 후속 작품들이 줄줄이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고, 2006년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가 이사카 작품 가운데 최초로 영화화되면서 그는 ‘기발한 발상과 기교를 마스터한 천재 작가’로 미스터리 독자와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평론가들이 오늘날 이사카 고타로의 절대적 인기가 바로 이 「명랑한 갱 시리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소설의 무대는 요코하마. 잘나가는 시청 공무원이자 어떠한 거짓말도 꿰뚫어 보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 나루세와 능청스러운 거짓말로 청중을 홀리는 자칭 ‘연설의 달인’ 교노, 동물을 사랑하는 천재 소매치기 청년 구온, 시계 없이도 누구보다 정확하게 시간을 잴 수 있는 유키코, 출신도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우연히 한 장소에서 어설픈 은행 강도 사건에 휘말리게 된 네 사람이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해 유쾌한 4인조 강도단을 결성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늘 별것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은행을 습격할 때만큼은 환상적인 팀워크를 선보이며 성공률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프로 갱단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강도질이 늘 순탄할 수만은 없는 법. 은행을 털고 귀가하던 길에 현금 수송차 습격단을 만나 모처럼 훔친 돈을 몽땅 빼앗기고(『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범행 도중 우연히 ‘상속녀 유괴 현장’을 목격하고는 ‘아가씨 구출 작전’에 뛰어들기도 하고(『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 괴한에게 공격당한 기자를 구해 주었다가 뜻밖에도 꼬리를 밟혀 곤경에 처하기도 하는(『명랑한 갱은 셋 세라』) 등 이들이 가는 길에는 떠들썩한 소동과 황당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은행 돈만 훔칠 뿐,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태연하게 자신들의 범행을 정당화하는 악당이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내 일이란 고작해야 책임을 지는 것뿐”이라며 후배의 실수를 덮어 주는 쿨한 직장 상사이자, 빚만 남기고 도망간 남편을 대신해 가장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 싱글맘이며, 동물을 보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평범한 청년이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면 물불은 물론 돈마저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시민이기도 한 4인조 강도단.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명랑한 갱들’의 활약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은행 강도’는 ‘악당’이라는 상식마저 잊은 채 4인조를 응원하고 이들의 위기 앞에 함께 가슴 졸이게 된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속편이나 시리즈물을 좀처럼 내놓지 않는 이사카도 “이 소설은 다르다”고 언급할 만큼 애착을 보였고, 「명랑한 갱 시리즈」는 이례적으로 3권까지 이어지며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은 작가와 더불어 성장해 왔다. 이사카 고타로 문학의 시초이자 정점인 이 책이 그의 작품을 기다려 온 팬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 될 것이고, 이사카 월드에 처음 발을 딛는 초심자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입문서가 되어 줄 것이다.
■ 줄거리
오늘도 순조롭게 은행을 턴 4인조 강도단. 돈 가방을 챙겨 유유히 범행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통장 정리기 근처에서 수상한 남자와 함께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의 여성을 발견한다. 여자의 이름은 쓰쓰이 요시코, 나루세의 직장 후배인 오쿠보의 약혼녀이자 거대 약국 체인 쓰쓰이 드러그의 상속녀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오쿠보와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가출 시위 중이라던 그녀가 왜 다른 남자, 그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와 함께 있는 걸까? 구온의 소매치기 스킬에 힘입어 남자의 주머니에 위치 추적기를 심어 둔 나루세 일당은 이번 일을 몸값을 노린 ‘상속녀 유괴 사건’으로 결론짓고, 요시코를 구출하기 위해 범인 추적에 나선다. 하지만 위치 추적기가 가리키는 빌딩에 잠입해 동정을 살피던 구온이 급한 볼일을 해결하러 화장실에 들렀다가 그만 2인조 유괴범에게 붙잡히고 만다. 요시코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요시코와 함께 갇힌 신세가 된 구온. 그런데 그들을 잡아 가둔 유괴범들, 가만 살펴보니 하는 짓마다 어딘가 허술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2인조 유괴범은 누구이며 요시코를 납치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