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하성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로 등단했다. 1999년 <곰팡이꽃>으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2004년 <강의 백일몽>으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루빈의 술잔>,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웨하스> 등이 있다.
섬세하고 정밀한 묘사 속에 감춰진 삶의 비경!
작가 하성란이 그려낸 신(新) 가족의 탄생
자신이 다른 이와 뒤바뀐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는 한 남자
지난한 길을 돌아서 그가 마침내 마주한 식사의 즐거움
인간의 심리와 개인의 일상을 섬세하고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을 발표해온 작가 하성란. 자신만의 독특한 내밀함과 섬세함으로 작품을 창조하며 문단의 총아로 자리매김했던 하성란의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된다.
『식사의 즐거움』은 1998년에 발표되었던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12년 만에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첫 발표 당시 ‘섬세한 세계 인식의 극치를 보여준다(평론가 김윤식)’, ‘장인적인 수공업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오랜만의 신선한 충격이다(평론가 신수정)’, ‘우리 소설의 상서로운 징후이다(평론가 황종연)’ 등의 상찬을 이끌어냈던 이 작품은 자신이 갓난아기였을 때 병원에서 다른 아기와 뒤바뀌었다고 믿는 한 남자가 생의 비의秘意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밀하면서도 절제된 필치로 ‘가족’이라는 보편적 테마 속에 담긴 인생의 본질과 인간의 실존에 대해 탐구해가는 작가적 인식은 삶과 인간관계를 다룬 하성란 작품 세계의 진지함이라 할 것이다.
혈연에만 얽매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미로서의 가족 문제가 점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 『식사의 즐거움』이 다시 읽히고 조망 받을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직시한 작가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 뒤바뀌었다고 믿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식사의 즐거움』은 주요한 두 개의 층위가 골격을 이루고 있다. 첫째, 현재의 부모가 자신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환상에 시달리는, 이른바 ‘기억과잉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 남자와 역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재경이라는 소녀의 이야기와 둘째, 주인공을 둘러싼 갈등, 즉 화가 치밀 때마다 밥상을 뒤엎어버리는 아버지와 그에 짓눌린 채 살아온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버지를 통해 증폭되어 온 일탈 욕구는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라는 의식을 남자에게 갖게 하고, 그로 인해 남자는 한 다른 가정을 감시하고 엿보다가, 내 집인 양 침입하기에 이른다. 낯선 남자의 침입에 소동을 빚었던 가족이 신도시로 이사한 후에도 남자는 바퀴벌레 방역 차 버젓이 나타나 “마스크를 벗는 순간 이 중년 부부는 순식간에 놀라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 놀란 부모님들은 남자가 찾아내지 못하는 곳으로 잠적해버릴 수도 있었다. 소독은 한 달에 한 번 있었고 지금 당장으로는 한 달에 한 번 부모님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며 자위한다. 이른바 스토커의 양상까지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이 인물을 통해 작가는 해체일로에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의미를 묻고 있다.
아버지를 부정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가 병적 인물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연민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끊임없이 FM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남자가 꿈꾸는 것은 포마이카 밥상에 차려진 한 끼의 식사이다. 그것은 ‘식사의 즐거움’, 가족애의 확인에 다름 아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새벽 2시에 고독에 갇혀 깨어 있는 재경, 건장한 체격만이 내가 살 길이라며 통조림을 훔쳐와 먹는 기태, 식사를 만들며 중간중간 술을 마시다 알코올 중독이 돼버린 어머니, 귀가 어두운 척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할머니 등 『식사의 즐거움』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소외된 실존과 억눌린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하성란은 그들이 꿈꾸는 가족애, 삶의 희망이 부재한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위기에 처한 삶을 감동적으로 묘파해낸다.
이 작품은 지금 읽어도 시간의 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족의 의미를 화두로 삼아 현대사회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보여진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절제미에다 흡입력까지 갖춘 눈을 뗄 수 없는 문장, 특히 혈연이 아닌 공동체적 유대감으로 엮인 가족이 등장하는 서사에서 더욱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며 일견 위태롭다. 그런 복잡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하성란은 일상과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수사법을 택하였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부모를 찾아 헤매며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자아 찾기를 보여주는 과정은 감동적이며, 가족을 통해 소설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작가와 함께 사물의 표면을 탐구하다 보면 우리도 마침내 그 표면이 감추고 있는 이면과 그 깊숙한 내면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식사의 즐거움』이 선사하는 일독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