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놀이―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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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회

이상은 어린이의 놀이에 관해서 몇 마디 해본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로 어른의 경우를 살펴보죠. 두 가지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꾼입니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도박이라는 놀이가 얼마나 인간을 사로잡고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집념이 되는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도박을 성립시키는 한 가지 필수적 요소가 돈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도박에 매혹된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목적이 아니라 매개입니다. 돈을 따거나 잃는다는 것은 도박꾼을 도박판에 붙잡아매두는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돈을 걸므로써 우연과 위험이라는 시련에 맞서보겠다는 철없고도 떨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룰렛판의 매력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신착란에 빠진 소설의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위험에 대한 끔찍한 갈증에 사로잡혔다. 별의별 스릴을 맛보았는데도 정신의 욕구는 채워지지가 않은 것 같았다. 정신은 도리어 그 때문에 더 격앙되어, 그것이 고갈될 때까지 새롭고 더 격렬한 스릴을 요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돈을 걸었으면서도 실리實利를 노리지 않는 이러한 위험에 대한 끔찍한 갈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투우, 고산 등반, 자동차 경주 따위의 동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며,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을 통해서 생명을 내건 놀이의 한 극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른의 놀이두 가지 축제

 

내가 들고 싶은 또 하나의 예는 축제입니다. 이것은 방금 예시한 위험에 대한 끔찍한 갈증을 채우기 위한 개인적 모험과는 달리, 억압되어 있던 삶의 기쁨을 집단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놀이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제 역시 순수한 놀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신경림의 농무를 읽어보십시오. 그 시에는 분명히 신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흔드는 일단의 농부들은 신명나는 춤을 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작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고, 그 전까지는 이른바 근대화에 의해서 농촌공동체가 해체되어가는 속에서의 농민의 시름과 한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가설무대에서의 연희 자체가 묘사되지 않고 그것이 끝났을 때의 텅 빈 운동장이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 상징입니다. 그리고 더 노골적인 한탄이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던가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라는 따위의 말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거의 비시적非詩的인 언어죠. 그러나 이 비시적인 언어는 아이러니컬한 것입니다. 산업화의 물결을 탄 새로운 풍습과 사물들이 산구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환경에서 시는 사라져갈 수밖에 없고 남는 것은 농민의 투박한 원한뿐이니까 말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반시적反詩的인 소박성을 시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뒤풀이처럼 추는 거친 춤에 현대의 산업사회에서의 축제의 뜻을 담으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뒤풀이가 아니라 한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려는 반항으로서의 놀이, 삶의 약동을 회복하려는 놀이입니다. 다만 슬프게도 그 놀이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축제가 언제나 이런 덧없는 한풀이로서의 소극성만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있으면,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라블레Rabelais의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들을 읽어보십시오. 그의 인물들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로만 존재하여, 먹고 마시고 놀고 웃고 소란을 떠는 것이 거의 생업의 전부처럼 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심지어 대학생활에 관해서도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보다도 가지가지의 놀이에 열중하는 장면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삶 자체가 카니발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카니발은 단순한 삶의 에너지의 분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세 말기라는 시대가 과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특히 우울한 종말론적 시간관에 항거하여, 그리고 율법과 규칙에 묶인 공적公的인 생활에 항거하여 전개한 반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세적 인간의 종언을 고하고 르네상스적 인간의 탄생을 알리는 다부진 외침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괴한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라블레의 작품세계는 부럽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대는 그런 활력을 이미 잃은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산업문명 속에서 축제는 새로운 사회의 예고도 아니며 현재의 사회를 노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신경림의 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패배주의적인 축제의 몸짓만이 남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상업주의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기획된 가짜 축제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담은 이제 그만두고 다시 본제로 돌아가기 위해서 한 가지만 확인해둡시다. 그것은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놀이가 놀이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자발성, 둘째로는 일상생활로부터의 벗어남, 그리고 셋째로는 금전이나 사회적 명예와 같은 직접적 이익의 배제가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직업 운동선수들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락 제공자로서의 생업에, 흔히 비정한 경쟁을 수반하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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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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