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찬 차르: 인신 희생 그리고 성스러운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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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회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행하는 기이한 현상들을 목격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가공할 만한 일은 인신 희생 제의였다. 본국의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신전에 향을 피우고, 가끔은 자기 자신들 중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데, 어떤 때는 칼로 자신의 혀나 귀를 자르고, 어떤 경우는 자신의 몸을 찌릅니다. 그래서 흘러나오는 피를 신전 안의 우상에게 바치고, 신전 여기저기에 뿌리며, 혹은 공중에 내던지는 등 여러 의식을 행하고, 이런 희생 의식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하루 일을 시작합니다. 또 그들은 반드시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도 가공스럽고 구역질나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우상들에게 뭔가를 청할 때 자신들의 소원이 더 잘 받아들여지도록 여러 명의 소년 소녀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성인들을 신전에 데려와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슴을 갈라 심장과 내장을 꺼내어 우상 앞에서 그것을 태우고 그 연기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여러 명은 이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목격한 것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고 말합니다.

 

학살을 밥 먹듯이 자행하여 잔인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스페인 전사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고백하는 이런 인신 희생이 실제로 있던 것일까? 사실 위의 보고문 중 심장과 내장을 태워 그 연기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설명은 부정확한 것이며, 실제로는 심장을 꺼내 의례용 돌그릇에 넣어 신에게 바쳤다. 하여튼 신전에서 희생자들을 죽이는 의식이 치러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로 밝혀졌다. 예컨대 고대 멕시코의 부족 중에서 가장 광적인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메시카 족의 경우를 보면 실로 다양한 인신 희생 제의를 거행했다. 폭풍과 비의 신인 틀랄록Tlaloc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수십 명의 어린이를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던져버리거나 산에 설치된 제단에서 희생시켰다. 어떤 축제에서는 노파의 목을 자른 뒤 한 전사가 그 잘린 머리채를 잡고 마구 흔들면서 온 도시를 돌아다녔고, 봄의 신인 시페Xipe에게 예배드리기 위해 한 사제가 희생된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아메리카 주민이 온화하고 평화적인 사람들이라고 믿어왔다. 비록 문화 수준은 높지 않지만 사악한 유럽인들에 비하면 이들이 오히려 선량하고 현명하게 살아간다는 소위 선량한 야만인bon sauvage’ 신화도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반대로 유럽인들의 초기 기록 중에 아메리카 주민들을 식인종이라고 기술한 것들은 피정복민들을 의도적으로 폄훼하고 악랄하게 왜곡한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과 고고학의 연구 결과 아스테카, 마야, 잉카 등 아메리카 문명권 주민들은 지극히 폭력적이며 인신 희생과 제의적 식인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아니, 그런 관행이 단순히 존재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심장과 피를 바치는 제의가 이 문명들의 핵심 요소라고 보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권에서는 전쟁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경우, 여러 왕국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데 대개 세 개의 왕국이 동맹을 맺어 다른 왕국들을 지배하곤 했다. 특히 틀라코판, 테츠코코, 멕시코-테노치티틀란 동맹이 가장 크고 강력했다. 전쟁이 빈번한 사회에서 엘리트 전사들은 특별한 삶을 누렸다. 그들은 평화 시기에는 코코아신과 전사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음료였다를 마시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미친 듯이 용감하게 싸웠고, 대개는 전장에서 죽거나 희생 제물로 돌 제단 위에서 생을 마쳤다.

주목해서 볼 점은 이 문명권에서 전쟁은 다른 지역의 전쟁과는 달리 종교적인 의미가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성스러운 경연이었다. 두 도시가 전쟁을 한다는 것은 곧 어느 도시의 신이 더 우세한지 전투를 통해 가리자는 의미였다. 그 때문에 양측이 동등한 출발선에 서서 전투를 시작해야 했다. 단순히 군인의 수가 많아서, 혹은 속임수로 이기면 승리의 가치가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상대방이 너무 기운다고 생각하면 자기 쪽 식량과 무기를 상대편에 나누어 주고 싸우기도 했다. 승리한 쪽은 상대방 도시로 밀고 들어가서 약탈을 했는데, 그 클라이맥스는 상대 도시의 신전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다. 그 후 전사와 민간인들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가장 중요한 포로는 적의 수호신상으로, 이 신을 잡아 와서 자기 도시의 신전에 가둔 후 상대방에게 공납을 부과했다.

이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될 수 있으면 적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오는 것이었다. 이 문명권에서는 전쟁의 결과로 포로를 잡아 온다기보다는 차라리 포로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전쟁을 꽃 전쟁xochiyaoyotl’이라고 부른다. 전투 방식은 매우 간단해서, 양측 전사들이 각자 상대편 전사 한 명과 맞붙어 결투를 벌인다. 포로로 잡는 것이 원래 목적이므로 상대를 죽이는 일은 거의 없고 상해를 입히는 정도에 그치며, 기껏해야 흑요석이 박힌 곤봉으로 쓰러뜨리는 정도이다.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의 머리 타래를 잡아서 제압하여 묶으면 싸움이 끝이 난다. 이렇게 잡은 포로는 끌고 가서 사제에게 넘겨주고, 그러면 적당한 시기에 희생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죽음의 의식이 뒤따랐다. 예컨대 메시카의 강력한 왕 아우이초틀이 우아스테카 족을 상대로 벌인 전쟁은 수천 명의 적군과 남녀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희생자들은 멕시코 계곡에 있는 네 개의 신전 계단 앞에 각각 한 줄로 서서 돌 제단에서 희생될 차례를 기다렸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관습처럼 슬픈 새 울음소리를 냈다.

전쟁 직후의 희생제 때 죽이고 남은 포로는 살려두었다가 다음번 중요한 제의 때 제물로 바쳐졌다. 희생제 때 죽은 사람들은 대개 전쟁 포로로 잡힌 성인 남성이었지만 어린이나 여성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포로가 없는 경우에만 할 수 없이 노예를 죽여서 제물로 바쳤다. 하루에 수십 명 심지어 수백 명씩 죽이는 제의가 흔히 20일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희생되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만으로도 경악할 정도이다. 이런 통상적인 연례행사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제는 신전의 완성과 같은 예외적인 축제 때 이루어진다. 1487년 멕시코 시의 대신전 완공 축제 때에는 2만 명이 희생되었다 하고, 또 그 이전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나흘 동안 8만 명을 희생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멕시코 계곡의 총 인구가 3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규모의 희생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의 편견과 달리 아스테카 문명에서 인신 희생은 감추어야 할 비밀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축제나 공공의식에서 너무나도 빈번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옥수수 신이나 사냥의 신, 혹은 바람이나 비, 태양과 달, 산이나 들판 등 모든 숭배 대상에게 사람의 생명을 바쳤다. 코르테스 이후 기독교 전도를 위해 파견된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의 기록 역시 아스테카인들의 인신 희생이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널리 퍼진 관행이었다고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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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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