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찬 차르: 유년기로부터 차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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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회

러시아는 광활하다. 1,7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국토는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10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넓은 땅에 러시아계를 중심으로 모두 128개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 나라는 국토의 많은 부분이 북위 50도 이북에 위치하여 겨울에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다. 북극권에 속하는 야쿠티아에서는 영하 71도를 기록한 적도 있다. 국토의 60퍼센트가 영구 결빙토이며, 대부분의 해안 지역은 겨울에 결빙되어 발트 해나 흑해 혹은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늘 러시아의 중요한 전략 과제였다. 그러나 동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남쪽의 카스피 해 근처에는 반건조 지대와 반사막 지역도 펼쳐져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국토의 대부분은 농작이 힘든 불모의 땅이고 경작지는 7.7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7.7퍼센트가 사실은 한반도의 여섯 배에 달하는 130만 제곱킬로미터나 되어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흑토 지대는 아주 비옥하여 러시아의 곡창 지대를 이룬다. 과거 이 나라를 방문한 서구의 여행자들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광대무변한 검은 땅 위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는 거기에서 잔인한 귀족에게 학대당하는 슬픈 피지배민의 참담함을 보았고, 누구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이 세상에 유일하게 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민족의 성스러움을 보았다.

춥고 광활하고 신성한 이 땅이 처음부터 거대 제국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이전 러시아 땅 위에서 펼쳐진 역사를 보면 우랄 산맥 서쪽 지역에 여러 공국公國들이 분할되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특히 몽골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자주 처하곤 했었다. 그즈음 장래의 대제국 러시아를 만들어간 중심 국가로 떠오른 것이 모스크바국이었다. 스텝 지역 한가운데 외떨어져 존재하는 도시와 그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진 미미한 세력이었던 모스크바는 14-16세기 동안 몽골에 저항하는 중심지로서 부상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주변의 공령公領들을 통합시키며 영토가 열 배로 성장했고, 조만간 시베리아로 무한 팽창해갈 준비를 하면서 강력한 전제 왕정으로 발전해갔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보면 아직 미력한 소국이었지만, 이들은 신이 이 나라를 통치하는 성스러운 국가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의 통치자들은 자신이 황제와 동급이고 주변 국가의 왕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기개 또한 가지고 있었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이 창대할 것이 분명했다. 대제국을 향한 도약을 시작한 인물은 이반 4, 흔히 이반 뇌제(雷帝, Ивáн Грóзный, Ivan the terrible)라고 불리는 미스터리로 가득한 차르이다.**

 

유년기로부터 차르까지

 

이반 4(1530-1584)의 별칭 그로즈니Groznyi’는 벼락 치듯 끔찍하고terrible 무시무시하다는fearsome 뜻이지만, 엄정함과 엄청난 위엄, 특히 상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가공할 힘이라는 함의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폭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혹은 소련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는 어떻게 하여 그로즈니한 인물이 되었을까?

그의 부친 바실리 3세가 사망했을 때 이반은 고작 세 살이었다. 결국 왕비 옐레나가 섭정했지만, 실제로는 왕비의 숙부인 글린스키 공, 그리고 그의 사망 후에는 그녀의 정부情夫 텔렙네프-오볼렌스키에 의존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섭정을 수행한 지 몇 년 후인 1538년 옐레나마저 갑자기 사망했다. (아마도 실권을 쥐고 있던 강력한 대귀족들인 보야르를 무시했다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보야르 측 내부에서 극렬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 투옥과 망명, 처형과 살인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예민하고 조숙한 어린아이에게 걸핏하면 칼부림과 독살이 자행되는 궁정은 분명 좋은 교육 환경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도 그가 분명 왕이므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극진하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모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영명하신 소년 군주 이반은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로 치면 중학생 나이인 15세 즈음에 그는 당시 모스크바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대귀족인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후일 그 스스로 즐겨 말했듯이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정치 행위였다. 한두 해 뒤에는 아마도 자신의 친구였다가 갈등이 벌어진 15세의 한 귀족 자제를 죽였고, 자신의 친족 중 한 명의 혀를 뽑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차츰 이와 유사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궁정 내 인사들과 그들의 자식들에 대해 살상 행위를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꼭 이반의 경우만이 아니라 당대에는 이런 정도의 폭력이 일반적이었다. 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보면, 보야르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감히 차르를 대적하거나 제거하려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족들로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판이 뒤집어질 정도로 지나친 카오스 상태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암묵적 합의를 하고, 그 한도 안에서 차르에 밀착하여 한 조각의 권력이라도 붙잡기 위해 치명적인 싸움을 벌였다.

1547116, 17세의 나이에 이반은 마카리우스 총주교가 집전하는 가운데 차르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가끔 차르라 불린 적이 있지만, 차르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한 것은 이반이 처음이다. 차르라는 말은 로마 제국 황제인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나 몽골의 칸을 가리킬 때에나 쓰이던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차르를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지상신국地上神國의 통치자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에 걸맞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정교하게 구성한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의 전례典禮에서 차용했다.

동로마 제국의 후신인 비잔틴 제국은 늘 모스크바국에 모범을 제공해왔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이제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국가는 불가리아, 그루지야, 모스크바 3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곧 튀르크에 정복당했고, 그루지야 역시 미력한 처지여서, 실질적으로 남은 곳은 모스크바 하나였다.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영적인 면에서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모스크바는 두 번째 로마(비잔틴 제국)가 몰락한 후 세 번째 로마가 되었으며, 앞으로 네 번째 로마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나라에서 정치와 종교는 굳게 연결되어 함께 움직였다.

차르로 등극한 이반은 같은 해에 보야르 가문 중 하나인 로마노프가의 아나스타샤와 결혼했다. 당대의 거의 모든 정략결혼과 달리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진정 행복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녀는 정치적으로 매우 총명한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이나 정치 상황이 오랫동안 평온하지는 못했다. 그가 대관식을 한 1547년 여름은 비정상적으로 더위가 맹위를 떨쳤고, 큰 화재가 일어나 목재로 된 이 도시를 휩쓸어 수천 명이 사망했다. 더구나 이때 크렘린의 종탑이 무너지자 민중들은 이를 마녀 탓으로 돌리며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효수枭首했다. 곧 보야르에 도전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차르의 숙부를 살해한 후 이반의 거처에까지 군중들이 몰려왔다. 당시 많은 기록들은 차르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증언한다.

다음 날, 이반은 민중의 뜻에 따라 보야르의 위세를 꺾어놓기로 결심했다. 마카리우스 총주교는 이반에게 능력 있는 인재들을 모아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근대 국가의 관료제라고 할 만한 것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신분제 의회와 유사한 기구인 젬스키소보르zemskii sobor를 정식으로 소집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 조치를 이 기구에 설명한 후 이를 승인받아 수행했다. 또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다. 기존 군대에 소총부대를 더한 이 군사적 개선은 주변 지역들과 전쟁을 벌이고 더 나아가서 대외 팽창을 모색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이때까지 타타르계 한국汗國들에게 공격을 당하던 모스크바가 이때를 기점으로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이반은 1552년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카잔한국을, 그리고 1554년에는 아스트라한한국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는 볼가 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반이 차르라는 이름으로 제위를 차지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카잔한국과 아스트라한한국을 정복한 이후로 보아야 한다. 프랑스의 역사가 브로델은 이 두 사건을 유라시아 역사의 큰 흐름을 전환시킨 결정적 계기로 해석한 바 있다. 이제까지는 유목민족들이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에서 동서 방향 혹은 남북 방향으로 횡행하다가 기회가 닿는 대로 농경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감으로써 큰 충격을 가하곤 했지만, 이제 동쪽에 중국이 버티고 서 있는 데다가 서쪽에 모스크바까지 강력하게 제동을 걸어 유목민족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포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유목민족들이 큰 세력을 이루어 정주 문명을 위협하고 파괴 혹은 정복하는 일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타타르계 한국 중 마지막으로 크림한국만 남았는데, 모스크바는 이곳으로도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 더 나아가서 북서 방향으로 리투아니아에 대해 공세를 취하고, 무엇보다도 동쪽으로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정복해 들어가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3) 모스크바는 아직은 강대국이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영토는 프랑스만 한 크기로 성장했으나 인구는 고작 200-500만 명 정도였고, 모스크바 시 자체의 인구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제 이 나라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러시아라고 불리며 본격적으로 제국 건설을 향해 팽창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이반의 통치 전반기는 야만적인 폭력 사태가 없지 않지만 유독 끔찍하거나 공포에 찬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정善政의 시기라고 해석할 측면도 있다.


 

* 땅이 광대하다 보니 오히려 인구가 부족한 형편이다. 러시아 인구는 현재 14,300만 명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수이다. 더구나 1990년대부터 어려운 경제 사정과 어우러져 인구가 감소 추세를 보여 이대로 가면 조만간 러시아인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었다. 2009년에 들어 인구 감소세는 진정되었고 그 후 미약하나마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 러시아사 일반에 대해서는 다음의 개설서가 유용하다.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외, 러시아의 역사, 조호연 옮김, 까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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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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