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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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회

핸드폰을 열어보니 자정을 막 넘었습니다. 초저녁잠을 잤습니다. 오랜만에 바다에 다녀와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쪽문을 열고 바깥마당으로 나섭니다. 고욤나무 아래 송판 한 장으로 만들어놓은 긴 의자에 걸터앉습니다. 사위가 안개에 온통 갇혔습니다. 양철 지붕에 내린 안개가 물방울이 되어 똑똑 떨어집니다. 뒷산과 바다 쪽으로 뻗은 앞산에서 소쩍새 두 마리가 돌림으로 웁니다. 써레질하려고 물 잡아놓은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미끄덩미끄덩 일어났다 잦아들기를 반복합니다. 참개구리들은 청개구리와 달리 합창이 주 전공인 것 같습니다. 안개에 젖은 가로등 불빛이 마당에 내려앉습니다. 아랫집 축사에서 소가 목덜미를 긁고 있는지 쇠파이프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옆집 개가 시멘트 바닥에 쇠밧줄을 끕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보일러 기름통 쪽으로 다가갑니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집에서 나오다가 굴러떨어집니다. 코와 눈 빼놓고 다 하얀, 커다란 누에 같은 강아지를 안아주려다가 멈춥니다. 미안한 마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집니다. 강아지 목테에 앞발 하나가 끼워져 있습니다. 마치 팔을 깁스한 사람이 목에 건 붕대 줄에 팔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아지 목이 조일까 걱정에 목테를 헐렁하게 매준 게 탈이었습니다. 목테에 걸렸던 강아지 앞발을 주물러주다가 세 발로 서보려고 얼마나 안간힘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머지 발도 주물러줍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납니다. 한겨울과 초봄에 비하면 소리의 치열성이 농후하게 묽어졌습니다. 엊그저께 봄이 왔구나, 한 것 같은데 벌써 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긴 빠른 것 같습니다. 세월을 지나가는 꽃나무 몇 그루 앞에 서서 마음 환해지는 빛을 좀 들이고 복사꽃 필 무렵에 제일 맛 난다는 살 붉은 숭어 회 몇 점 먹은 게 전부인 것 같은 이 봄 아쉬워 어찌 보내야 할까요.

 

어제는 가는 봄에 마음이 울렁거려 동네 형님 고기잡이배를 탔습니다. 이상하게도 바다에 나가면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물결의 흔들림에 마음의 흔들림이 상쇄되는 걸까요. 작은 배 곁으로 큰 배가 지나갈 때 물결이 없는 날보다 물결이 있는 날 배가 덜 흔들리는 이치를 닮는 걸까요.

그물 터에 도착해, 배 위에서 물이 빠져 뻘 그물이 드러나길 기다리며 유난히 술에 젖어 허송세월 보낸 봄을 찬찬히 면접해보았습니다. 술을 많이 마신 내가 내 앞에 앉습니다. 술을 안 마신다고 결심해놓고 또 술을 마셨군. 모르겠어, 내 말을 가장 안 듣는 게 나야. 오늘은 뭐 땜에 마셨는가. 밤을 꼬박 새워 소설책을 한 권 다 읽었어. 글쎄, 내가 몇 년 전에 모 지방신문이 주관하는 문학상을 받고 수상 소감으로 썼던 이야기가 소설을 전개하는 핵심 스토리와 같은것 있지. 내가 부지런했다면 먼저 발표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지. 그럼 어제는 왜 술을 마셨는가. 타계하셔 수목장한 스승님 나무를 찾아뵙고 왔지. 투병 중인 스승을 생전에 찾아뵙지도 않은 놈이라고 고로쇠나무에 앉은 비둘기와 졸참나무에 앉은 까치가 울며 꾸짖더라고. 실리카겔처럼 목마른 스승의 뼈는 나무뿌리 밑에 묻혀 있었으나 기침처럼 푸른 스승에 시 정신은 우뚝, 소나무로 서 계셨어.

한 채로. 글쓰기에 나태한 내가 부끄러웠지. 그럼 지난주에는 왜 마셨는가. 어머니를 뵙고 왔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누이 집에 갔었지. 허연 머리 인형처럼 어머니가 잠들어 있었어. 누이는 출타 중이고 낮잠에서 깬 어머니가 밥상을 차렸어. 어머니는 간장 종지 하나 드는 데도 온몸의 힘을 손끝에 다 모았어. 혈압 약을 먹으면서도 목울대에 전 힘을 집중시키더라고. 치마를 갈아입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한 손 짚고 방바닥에서 일어날 때는 기합까지 넣으시던 . 관절 꺾이는 소리로 말이야.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야 작은 동작 하나라도 해낼 수 있었지. 내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힘이 없는 노모는 숨소리만 더 커지고 거칠어졌지. 그래서 한잔 찐하게 했었지.

 

그물이 물 밖으로 다 나 준비해온 참을 먹고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먹으려고 갈매기 떼가 모여들었습니다. 교미기가 끝난 갈매기들은 몸에 알을 키우기 위해 사나웠습니다. 갈매기들은 입맛이 까다로워 늘 드는 물고기가 아닌 철이 되어 새로 들기 시작하는 물고기들만 먹었습니다. 한 마리를 모조리 먹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내장만 빼 먹어 물고기 상품 가치를 떨어뜨려놓았습니다. 수온이 올라가고 공항이 들어서면서 물살에 힘이 약해져 숭어가 잘 안 든다고 투덜대며 동네 형이 그물을 털었습니다. 숭어를 살리기 위해 망태를 물골에 매달아놓고 낙지를 잡았습니다. 낙지는 춥거나 더우면 깊은 물로 도망가 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 뻘낙지는 거의 봄과 가을에만 잡습니다. 봄 낙지는 숨어 있는 구멍의 길이가 가을 낙지에 비해 짧아 잡기는 쉬운데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또 가을 낙지는 매일 새로 들어와 뻘에 앉아 매 물때마다 잡을 수가 있는데 봄 낙지는 조금 때에 앉은 것을 조금이 끝나는 세 물네 물때에 잡고 나면 한 사리를 기다려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어제는 물때가 맞지 않아 남들이 잡아 가고 남은 이삭 낙지를 잡았습니다. 낙지가 없어 몸만 잔뜩 지친 하루였습니다.

 

한밤중에 강아지를 붙잡고어이구, 많이 아팠지? 이제 괜찮을 거야. 길상아, 그래도 너는 네 집이 있잖아. 네가 나보다 부자다어쩌고저쩌고 애기 달래듯 하다 누가 볼까 남세스러워 주위를 둘러봅니다. 사방에 안개뿐입니다. 아직 장가도 못 간 그림자가 희미하게 몸에 매달려 있습니다. 개가 집을 지키는 것은 제 집을 지키는 걸까 주인집을 지키는 걸까, 문득 떠오른 가벼운 생각으로 머리를 환기시키며 방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밤 나는 봄 편지 한 장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봄 자체가 누가 보낸 긴 편지 한 장 같으니 큰일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톡 토라지며 시샘도 하는 바람과 화려하면서도 따듯함을 잃지 않는 꽃과 달뜬 새소리 수놓인 봄 편지. 그 봄 편지를 누군들 안 받고 누군들 왼종일 안 읽어봤겠습니까. 하오니 나는 누구에게 어떻게 봄 편지를 써야 할까요. 스무 살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써볼까요, 떠나는 봄에게 써볼까요. 복숭아꽃들은 평화롭게 성벽을 넘었고 숭어들은 물속에서 빠르다고 써볼까요.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들어나도 술을 마셨다고 써볼까요. 읍 장날 사 온 강아지 혀는 얇고 응석은 대단하다고 쓸까요. 참 막막합니다. 동창 중에 봄에 대해 시를 쓰라는 입학시험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어 머 니, 딱 세 글자를 쓰고 합격했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봄은 어머니처럼 너그럽고 넓어 모든 것을 받아주고 모든 것이 되어주기도 하니 위에 늘어놓은 마음 설거지감 같은 글을 봄 편지라 해도 화는 내지 않으시겠지요.

 

나를 지나간 이 봄, 내가 지나온 이 봄, 잘 가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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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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